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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zangpak님의 서재
  • 향일성의 시조시학
  • 이승하
  • 16,200원 (10%900)
  • 2015-08-10
  • : 21

감나무 문 밖으로 홍시가 걸어 나왔다

 

                                       - 『향일성의 시조시학』을 읽고

 

   

  황진이의 <동짓달 기나긴 밤을~>을 읽으며 여인의 절절함에 가슴이 뭉클했던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시조의 대부분은 교과서에서 배운 것들인데 짧은 형식으로도 인간의 심사를 극진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으로 다가왔었다. 하지만 시조는 곧 잊혀졌고 가끔 아침신문에서 시조를 읽긴 했어도 현대시조가 어떤 지평에 놓여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뒤늦게 시창작 공부를 하면서 시인이자 평론가인 이승하 교수의  『향일성의 시조시학』을 접하게 되었다. 서문에서 저자는 시조를 사랑하는 성실한 독자로서의 연구결과일 뿐이라고 겸손해하지만 막상 책을 읽다보면 등단 후 30년동안 시를 쓰고 가르친 저자의 내공이 흠씬 묻어 나온다.

     

  이 책의 제 1부는 시조 창작에 대한 이론을, 제 2부는 시조시인 열다섯 분의 작품을 다루고 있다.      

  <1부>에서는 현대시조를 쓰는 자가 지향해야 할 창작의 자세를 배울 수 있었다. 시조의 형식은 정형률이라는 틀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내용은 음풍농월과 회고지정에서 벗어나 현대성을 획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성이란 구체적으로 상상력의 새로움, 표현의 참신성, 튼튼한 주제(p.26)를 포함하는데 시조 또한 관념의 산물이 아니라 경험과 관찰의 산물(p.33)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튼튼한 주제는 어디서 오는가? 저자는 현실비판의식이나 역사의식, 혹은 민중의식(p.50)을 강조한다. 시조시인이라 해도 역사와 현실에 대해 냉철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형식의 문제. 원래 평시조는 3·4조의 음수율을 가진 3자 6구, 45자 안팎의 정형시인데 현대시조는 연시조와 사설시조가 많이 쓰이고 있음을 알았다. 사설시조의 형식도 분화되어 사실상 자유시와 구분이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시조는 형식에 ‘갇힌’ 시가 아니라 형식을 ‘갖춘’ 시입니다. 시조가 갖춘 형식, 그것이 곧 정형률입니다. 정형율격의 자연스러움이 심상의 깊이를 이끕니다”(p.82)라는 박기섭의 말에서 현대시조가 나아갈 방향을 본다. 시조는 본래 시조창이라는 노래에서 유래된 장르이니 만큼 무엇보다 노래가사로서의 율격을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저자는 사설시조라는 파격이 시조의 도약을 꾀할 기회라고 보면서도 그 연원이 세태풍자에 있음을 상기시키며 지나치게 길어지거나 가벼운 재담으로 그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p.102)

      

  <2부>를 읽으며 감탄하면서도 한편 부끄럽다. 우리 현대시조가 이렇게까지 발전하고 있었구나! 우리가 구태의연한 장르라고 소홀히했던 시조의 불씨를 오늘에 되살려 이렇듯 활활 타오르도록 쓰고 또 쓰셨을 시조시인들께 고개가 숙여진다. 시인이면서도 시조를 꾸준히 탐독하고 연구해 온 저자의 노력 덕분에 열다섯 시조시인의 개성있고 멋진 현대시조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어 좋았다. 그중 내 가슴에 오래 머무는 몇몇 구절을 골라본다.

 

살점을 다 발리고 뼈만 데리고 돌아온 노인 / 등 굽은 바다 한 끝을 간신히 치켜들고 / 뒤채는 물굽이, 굽이 渾身으로 지운다 (진복희, 「夕陽 - 知天命 3」)

 

冬天을 수틀삼아 넋을 뜨던 바늘자국 / 매운 바람을 갈라 말문 이제 트이신가 / 가슴속 빙판을 질러 날아오르는 새떼들 (진복희, 「눈발 2」)

 

- 저자의 말대로 자연과의 대결 끝에 얻은 이미지가 눈이 부시다. 정제되고 압축된 언어로도 얼마든지 묘사에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돌바닥에 흥건히 괸 어둠의 먹피를 찍어 마구 막치로 환을 치듯 환을 치듯 / 울음도 웃음도 아닌 슬픈 쾌감의 / 一人舞   (박기섭, 「처용」)

 

폐기능 검사와 기관지 내시경 검사를 마친 아버지의 깡마른 늑골과 견갑골 사이로 그해의 늦은 가을이 오다   (박기섭, 「그해의 늦은 가을이 오다」  1연)

 

- 고전과 일상을 이야기하면서도 전혀 진부하지 않은 세련된 시어를 구사한다.

 

물에게 길을 물었다 낮은 곳이 길이라 했다 / 바람에게 길을 물었다 빈 곳이 길이라 했다 / 길에게 길을 물었다 가는 곳이 길이라 했다   (민병도, 「길을 묻다」)

 

겨우내 속을 비운 피라미가 뛰는 쪽으로 / 기우뚱, 수면이 몇 차례 더 흔들린 뒤 / 끊어진 낯선 길들이 풀밭에서 만난다   (민병도, 「3월」  마지막연)

 

- 길은 어디에 있는가, 관념어라고 여겼던 길이 구체성을 획득하는 순간이다.

 

자식도 이젠 커서 밥 때가 달라지고 / 동그마니 둘만 남은 경칩 무렵 점심 한 때 / 아이들 키울 때처럼 밥숟갈에 올려준다

 

파도로 뒤척이고 심연을 헤집어도 / 애초 내 바다엔 없으려니 도리질한 / 고래가 앉아 있나니···역시 등잔 밑이다   (이승은, 「고래, 찾다」  2~3연)

 

시장기 돌던 불빛이 꽃밥으로 배부르다   (이승은, 「꽃밥」  종장)

 

 - 뭐니뭐니해도 좋은 시(시조)는 따뜻한 감동을 동반한다. 현재의 삶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럽지만 우리가 문학작품을 읽는 이유는 결국 위안을 얻고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탐욕의 눈 반짝이며 냄새를 따라 가다 쥐약 묻은 생선머리 식욕을 저당 잡혀 한 토막 황홀함과 불안감을 씹는다 사대강 물줄기 따라 흘러가는 반값 등록금 모두가 잠든 마을 쥐 죽은 듯 조용한 밤 날카롭게 갉는 소리, 대들보 허무는 소리, 눈 못 뜬 바람들만 청계천에 흘러들고 쥐꼬리 월급봉투 조등처럼 내거는 집들   (이송희, 「광마우스」  중장)

      

 - 중장이 제법 긴 이 사설시조를 읊다보면 예나 지금이나 한많은 민초의 설움이 질펀한 풍자의 가락으로 전해져 온다. 이것이 바로 시조를 음미하는 맛이려니!

 

척하면 열려라 뚝딱, 천국 문도 연다는 / 우리 동네 공인 9단 열쇠 장인 김만복씨 / 꽉 막힌 생의 비상구, 정작 열 줄 모르면서

 

온 세상 잠긴 문은 노다지, 노다지라 / 불러줍서예! 집집마다 전화번호 붙여놓고 / 萬 가지 福 중에 하나 느긋이 찻물 우린다   (박해성, 「만복열쇠점」  첫연과 끝연)

 

이 땅의 첫새벽을 목청 높여 깨웠다는 / 대대손손 누리던 가문의 프라이드pride에 / 한바탕 비등점 너머 훨훨 날고 싶었건만   (박해성, 「프라이드치킨」  부분)

 

  - 2007년도에 등단한 신예 시조시인이라는데 젊은 패기가 만만치 않다. 끊임없는 실험정신을 보여준다고 하니 앞으로 주목해야 할 것 같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현대시조들은 이만큼이나 성장해 오고 있었다. 변방의 작가들을 발굴하는 데 앞장서온 저자의 시조사랑정신이 듬뿍 담겨있는 이 책 덕분에 시조공부를 제대로 한 느낌이다. 시조시인들 뿐만 아니라 문학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실 것을 권한다. 비평서이기 이전에 어떻게 시조(시)를 써야 할 것인가에 대한 길잡이책으로서도 훌륭하다. 행간에 머무는 저자의 따뜻한 죽비소리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아, 나도 좋은 시조 한 편 꼭 써보고 싶다는 바람이 저절로 솟구친다. 마치 "감나무 문밖으로 홍시가 걸어 나오"(배우식의 「감꽃 아버지」에서)듯이. 잘 익은 홍시들이 시조문학의 앞날을 풍성하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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