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전체보기

알라딘

서재
장바구니
녹림서옥
  • 배가본드 36
  • 이노우에 다케히코
  • 4,500원 (10%250)
  • 2013-12-24
  • : 984

1년 반 전 여름. 책이 어느 순간에 집을 삼켜 버릴 정도의 수준이 된 적이 있었다. 책장이 3개나 있지만 1개당 50권 정도는 꼽을 수 있는 데 거기도 꽉 차고, 바닥에는 세로로 위태롭게 쌓여져 있는 책들. 왠지 책에 포위된 이 느낌. 탈출하고 싶었다.

한적한 토요일 오후, 너무 오래된 책들과 철이 지난 법 관련 서적들은 집 앞 고물상에 버리고 그 돈으로 담배를 사려는 창조 경제를 구상하였다.

고물상은 집에서 5분 거리다. 아침 출근할 때마다 이미 철문은 활짝 열려있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수레를 들고 출발 준비를 하고 계신다. 희끗희끗한 머리를 올백하고 꽁지 머리, 위에는 허름한 티셔츠와 조끼차림. 바지는 군복. 수염이 더부룩한 분이 항상 철문 앞에 나와 여기를 지나칠 때면 청소를 하고 계신다. 그리고 뭐라 뭐라 써 있는 영문 티와 청바지를 입고 스포츠 머리로 여기 저기 뒤에서 뛰어다니며 세수대야로 물을 뿌리고 있는 청년도 한 명 있었다. 이 두 분이 여기 고물상의 주인들 인 것 같았다. 여기 사장님은 인자하신 듯, 항상 할머니, 할아버지께 손수 커피를 타 주시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고물상에 가서 인사를 하고 수레를 하나 빌린 후 책들을 실어 갔다. 한 무더기의 책을 가지고 가는 나를 반갑게 맞이 해 주시는 두 분.

책들을 저울대에 쌓으며 법학 관련 책이 많이 나오는 걸, 꽁지 머리의 사장님은 유심히 보시는 듯 했다. 책을 모두 계산한 금액, 몇 천원을 손에 쥐고 담배를 사려고 급하게 가려는 나에게 사장님은 주저 하듯이 말을 꺼내셨다.

 

“저 혹시 법 공부를 하시나요?”

“네? 아, 그냥 준비하는 시험이 있어서요.”

나의 답변에 무슨 확신이 서시는 지. 사장님은 사무실로 나를 초대했다.

 

“저기 책 팔러 오신 분에게 죄송하지만 조금 말씀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죠.”

사장님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여기서 일하는 스포츠 머리의 청년은 올해 25살. 지체 장애인 3급이라고 했다. 몇 달 전 수레를 끌고 다니며 파지를 모아 오길래. 젊은 청년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라 관심을 가지고 지켜 봤다고 한다.

이 청년은 부모님과 함께 살지만, 어머니는 생수 공장을 다니시다 몇 년 전 중풍으로 쓰러져서 누워 계시고, 아버지는 허리 디스크가 도져서 병원도 못 다니시고 집에만 계시기에 자신이라도 돈을 벌려고 파지를 모으기 시작했다고 한다.

주변에서 매미의 시끄러운 소리와 사무실에서 들려오는 교통방송. 찌는 듯한 더위. 그 속의 청년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더 덥고 숨이 막혔다.

사장님은 그럼 왜 직장 같은 데나 공장으로 취직을 하지 파지를 모으냐고 물어 보았다. 파지 줍는 일은 정말 돈이 안되기 때문이다. 청년은 어머니가 쓰러지셨을 당시 벼룩시장 같은 걸 보고 돈을 많이 준다는 말에 인천까지 일을 하러 갔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가 지체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1년 동안 일을 시켜 준다는 명목 아래 그를 컨테이너 박스 같은 곳에 가두고 일을 시키며 집에 보내지 않았다.

집에 가고 싶어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도망을 가 보았지만 얼마 가지도 못 해 다시 잡히고 또 잡히면 심하게 구타를 당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치 만화처럼 아침에 컨테이너 박스에서 일어나니 문도 열려있고 자신을 감시하던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런 기회를 놓치면 탈출을 못한다는 생각에 그곳을 달리고 달려 탈출했다고 한다. 전철역에서 집에 가고 싶지만 돈이 없어, 역에 오시는 분들께 사정을 말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결국에 역의 직원에게 사정을 말하고 집에 다가 연락을 해 무사히 집으로 올 수 있었다.

악몽 같은 시간을 보낸 후, 경찰에 신고를 하고 보내던 그에게 법원에서 하나 둘 우편이 오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3천 만원 정도의 빚을 갚으라는 것이었다.

“아니, 내가 여기까지 듣고. 기가 막히더라고, 지체장애인들 데려다가 노예처럼 일 시킨다는 건 들어 봤는데 직접 들으니 어이가 없어 가지고 말이야. 내가 그래서 정운이(그 청년)에게 집에 있는 통지서들 가지고 와 보라고 했어. 근데 봤더니 핸드폰 요금이 300만원 넘는 것도 있고, 그게 한 두 개가 아니더라고. 게다가 내용들이 무슨 사기 같은 것을 했다고 법원에서 벌금을 내라고 천 만원 정도 통지서가 나왔어. 빚이 그리 많으니 핸드폰 하나 개통도 못하니, 어디 직장에 취직이나 할 수가 있나. 게다가 본인도 그럴 엄두도 못 내고 말이야.”

사장님은 파지로 돈을 벌 수는 없으니 자신의 일을 도와주며 월급을 받으라고 권유했고, 그 때부터 정운이는 이 곳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중학교 밖에 못 나와서 말이야. 이거 뭘 도와주고 싶은 데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아까 학생이 책을 버리는 데 법 관련 책들이 많이 나오더라고. 우리한테 사실 직접 버리러 오는 사람들은 없거든. 다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이 가지고 오시지. 그래서 아 글쎄, 학생이 책을 버리는 데 막 감이 오더라고. 이 사람은 뭘 알겠지 하고 말이야.”

그러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을 향해

“정운아! 정운아! 이리와 봐! 얼른 얼른 그거 나중에 하고!”

뭐냐. 이 주체 못하는 운명적 파도의 흐름.

정운이는 땀에 흠뻑 젖은 채 목에 걸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들어왔다.

사장님은 아빠 미소를 지으시며

“인사 드려. 이 분이 법 전공하신 데”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30분 가량 앉아 있었는데 어느 새 법 전공 학자가 되어 이 곳 사무실에 존재했다.

토요일 담뱃값 벌려고 책 팔러 왔는데 법학 전공 학자가 되어버린 청년의 기구한 사연을 그대들은 들어 보셨는가.

무대는 갖춰졌고 난 그 역할을 멋지게 해 내야 했다.

마치 법 공부 몇 년 한 사람처럼 일어서서 정운이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정운이는 손을 수건을 닦은 채 고개를 푹 숙이며 인사를 했다. 고개를 숙이는 그의 등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등에서 하늘을 향해 솟아 오르는 땀의 열기를 보며, 그가 얼마나 고단하고 열심히 삶을 살아가는 줄 알 수 있었다. 루쉰 선생은 서점에 자신의 책을 사러 온 노동자가 준 돈을 두 손에 받고 그 무게가 돈의 무게가 아닌 이름 모를 생명의 무게처럼 느꼈다고 쓴 구절이 있었다.

 

여기서 물러서면 우리 셋 다 피 본다. 왠지 몰라도 아는 척 해야 할 것 같고,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저 눈들을 향해 외쳐줘야 할 것 같다는 압박감이 들었다.

머리에선

‘깨끗하게 돌아서라. 모른다고 해라. 여기서 더 들어가면 큰일이다.’

입에선

“사장님, 제가 지금은 경황이 없이 와서요. 모레 다시 한번 찾아올 테니 정운씨에게 온 통지서 좀 가져다 주시겠어요. 한번 저도 살펴봐야 될 것 같아요.”

망했다. 망했어. 육체와 정신이 따로 노는 나란 남자. 멋진 남자.

사장님은 자신의 예견이 맞았다는 듯이.

“어, 그래. 그래. 학생도 봐야 더 자세하게 알 수가 있겠지? 내가 준비해 놓을께.”

환하게 웃으시며 커피 한잔을 더 타 주셨다.

밖으로 나와 사장님과 담배를 피며 옆에서 서 있는 정운이를 천천히 보았다. 정운이는 담배를 피며 하염없이 바닥을 보고 있었다. 날씨가 더운 탓인지 쑥스러운 탓인지는 몰라도 나를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정운아 우린 소개팅 하는 게 아니란다. 너가 나에게 부끄럼을 탈 필요가 없어.

난 가슴 큰 여자가 좋아.

집으로 돌아온 나는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 머리를 감싸 쥐었다. 고뇌, 고뇌의 폭풍우였다. 어떻게! 어떻게! 도울 수 있단 말인가? 뭘 알아야 돕지. 나도 법 모르는 데 어쩌냐!

인간의 정지된 뇌와 다르게 자연은 규칙적으로 움직였고, 하루, 이틀이 지나갔다.

저녁에 찾아가야 하는 고물상을 앞에다 두고 심각한 고민에 휩싸였다. 이대로 튀어야 하나? 아님 사실대로 말하고 변호사에게 찾아가 보시라고 할까?

변명을 뭐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그들의 기대에 찬 그 눈빛들이 생각났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교내 법학과 교수님 사무실을 찾아갔다.

교수님 사무실 앞에 있는 철문이 어찌나 무거워 보이던지 두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옥에 빠진 그들과 나를 구해야 한다는 절박감에 나는 문을 두드렸고, 그 안에는 한 분의 노신사가 앉아 계셨다.

읽으셨던 책을 덮으시고 의아한 듯이 나를 쳐다보시는 교수님께 인사를 드렸다.

“학점 때문인가?”

교수님은 차분한 표정으로 양 손에 깎지를 끼고 책상에 팔꿈치를 올리시며 말했다.

“고…고물상 때문입니다.”

더운 날씨, 날카로운 인상의 교수님, 연구실이라는 막힌 환경.

난 그곳에서 뇌세포가 뒤엉켜 버렸나 보다.

“고물상? 신의칙 판례에 나온 거 말인가?”

이건 뭔 소리냐?

교수님의 진지한 대답에 난 더 당황하고 무슨 대화인 지 모르는 혼란감속에 자아가 붕괴되는 줄 알았다.

뽑아간 음료수를 책상 앞에 올려 놓으며 난 땀을 폭포수와 같이 흘리며 내가 겪고 있던 일들을 얘기해 드렸다.

교수님은 허허 웃으시며.

“아, 직원이셨군요. 저도 학생 같지 않아 보이기에 좀 놀라기는 했었어요. 민사 소송이 걸린 듯 한데 저도 근거 자료가 없으니 뭐라 답변 드리기는 힘들고, 무료법률구조공단이라는 게 있습니다. 아마 O시에도 그 사무소가 있을 테니 거기를 꼭 찾아가 보세요. 전문가들이 있으니 무료로 그 부분들을 해결해 줄 겁니다.”

무료법률 구조공단! 내 귀에는 그 단어가 천국의 트럼펫처럼 울려 퍼졌다. 교수님에게 감사하다고 고개를 푹 숙이며 여러 번 인사를 드렸다.

결전의 날. 우리는 고물상의 철문을 닫고 고요한 사무실에 앉았다. 내 상반신만큼이나 쌓여 있는 통지서들을 살펴보며 하나 하나씩 체크해 갔다. 그런데 여러 번 독촉이 왔음에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은 정운이가 참으로 이상했다. 대략적으론 이야기를 하는 데 세부적인 상황까지 물어보면 답변을 못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방금 말한 것과 지금 얘기한 것이 서로 부딪쳐서 말이 안 되는 것들도 있고, 말하던 나도 지칠 뻔 했다.

눈치를 보시던 사장님은 나를 데리고 나오셔서 얘기를 하셨다.

“내가 지체장애는 뭔지 잘 몰랐었는데, 정운이 일 시키면서 어떤 건지 알았지. 쟤가 말을 표현을 잘 못하고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하면 이해를 못 하더라고. 아침에 세수대야에 물 뿌리는 거 가르쳐 주려고 세수대야 가지고 오라고 하면 주저 주저 하다가 아, 글쎄. 수레를 가져 오더라구. 그래서 나는 쟤가 나 가지고 장난치는 줄 알았다니까.”

사장님의 이야기는 정운이가 사람들보다 약간 떨어지는 의사소통 능력과 지능이 사람들 보다 못하다는 얘기였다. 그러니 얘기하다가 답답하면 정운이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니까 이해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인내와 인내를 걸친 대화 속에서 결론은 정운이는 인천에서 그의 명의를 도용 당해 통장이 쇼핑몰 사기 계좌가 된 것인 것 같았다. 정운이를 가둔 그들은 물건을 보낸다고 하고 물건은 보내지 않은 채 돈만 정운이 통장으로 받은 채, 잠적을 한 것 같았다. 결국에 명의자는 정운이니까 당연히 그가 고소를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운이가 알고 그 사기를 도운 건지 그렇지 않은 지가 명확하지 않았다.

일단 사장님과 정운이에게 무료법률구조공단을 내가 아는 데로 설명하고 그곳을 같이 찾아가 보기로 했다.

토요일 오전, 무료법률구조공단을 방문했다. 허름한 건물 3층에 위치한 공단은 주변에 ‘개인회생 개인파산’이라는 커다란 글귀를 써놓은 법무사, 변호사 사무실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마치 ‘불신지옥 예수천당’이 한때 지하철을 지배했듯 이 세상은 ‘개인회생 개인파산’만이 지배한 듯 오로지 그 글귀들만 빨간 색으로 주변을 장식하고 있었다.

좁은 사무실에 사람들은 이미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번호표만 하염없이 보는 사람, 당신들은 뭐 땜에 왔느냐라며 노골적으로 불쾌한 눈빛으로 두리번거리는 사람. 차림새들은 모두 간단한 티셔츠나 세월 지난 셔츠 차림으로 폭풍이 지난 황량한 들판에 서 있는 앙상한 나뭇가지들처럼 그들은 앉아 있었다.

안내되어 간 칸막이 친 책상 앞에서 구조공단 직원과 대화를 나누었다. 바가지 머리의 30대 중반 정도의 남성이 정장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이미 눈은 반쯤 풀린 채로 쉬지도 않고 떠 들은 듯 혼이 나가 있는 표정이었다.

그 앞에 스포츠 머리의 정운이는 눈을 깐 채 앉아 있었고, 의자를 끌어와 양 옆에 수호신처럼 앉은 꽁지머리 군복바지 차림 사장님과 정장 차림의 올백머리의 나.

우리의 이름 모를 아우라에 직원도 약간 움찔 하시는 듯 보였다. 자초지종은 내가 설명하고, 사장님은 정운이를 그렇게 만든 무리들에 대한 감정적 격노를, 정은이는 ‘진실입니다’ 라고 짧게 말했다. 셋이서 파트를 나누어 노래 부르는 걸그룹처럼 내가 나오면 둘이 쉬고, 사장님 나오면 둘이 쉬고, 걸스데이처럼 우리는 호흡을 맞췄다. 직원은 우리를 번갈아 보며 정말 진지한 자세로 들어 주었다. 우리가 말하는 거 집중 안 했다가는 자신에게 어떤 해를 입힐 지 모르는 공포감을 느꼈을 지 모르지만 그의 눈빛은 참으로 진지했다.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날아온 통지서들을 분석하며 그는 간간히 예리한 질문들을 하나씩 던졌다.

조사를 해 준 직원은 이미 정운이를 괴롭힌 주범은 3명인 데 그 중 2명은 판결을 받아 감옥에 있다고 얘기해 주었다. 그들은 정운이 뿐만 아니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많이 그렇게 해 와서 고소를 당하고 사법적 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다만 나머지 한 명이 잡힘으로 정운이의 소송에 대한 해결이 된다고 해 주었다. 대신 지금 빚 진 것들이 핵심인데 나머지 한 명이 잡혀 법원에서 정운이의 무고함이 밝혀질 것이고 그러므로 빚들은 소멸될 것이라 해 주며, 지금은 그런 상황들이 진행 중이라 정운이에게 통지서들이 어떤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 해 주었다. 다만 신용불량도 그 때 모두 해결될 것이기에 그 때까지 힘들어도 버티라고 하였다.

 

우리의 굳은 표정이 풀리는 것을 보고 환하게 웃는 직원의 그 미소가 어찌나 아름답던지. 그 때 그의 뒤에서 어떤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내가 꿈꾸던 것도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에게 도움을 주며 돈을 버는 것. 그것이 내가 꿈꿔온 길이지 않는가? 바쁜 직장 생활 속에 노무사 공부를 한다고 하지만 의욕이 넘치지 않았던 나는 직원의 모습을 보며 저것이 진정한 실력자의 모습이라 감탄을 하였다.

셋이서 돌아오는 길에 사장님은 냉면을 사주셨고, 우리는 같이 먹으며 서로를 칭찬했다. 예전에는 잘 몰랐던 느낌이었다. 누군가를 도와준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 근데 참 신기한 것은 그를 도와주며 나 역시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나도 복잡한 것들 것 누군가를 위해 노력하면 해 낼 수 있구나 하고 말이다. 내 안의 이런 용기가 있는가 하고 말이다. 아마 내 일이라면 이렇게 용기를 가지고 부딪치진 못 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법학과 교수님과 공단의 직원을 보며 내가 가고 싶은 길에 대해 욕심이 생겼다.

복잡한 일은 해결이 되어 마무리가 됐지만, 제대로 말도 못하는 정운이를 같이 무언가를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못하는 건 읽고 쓰는 능력이 퇴화되어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문득 스친 생각은 고물상 사무실 책꽂이 있던 만화책들이었다.

사장님은 그 책들은 팔기에는 아까워 남겨 놓았다고 하시는 데, 그 책들 중에는 ‘배가본드’ 전 권도 들어 있었다.

방랑자 – 배가본드

난 이노우에 타케히코가 미야모토 무사시를 그릴 때 그를 반대했었다. 1권부터 한 10권까지 읽다가 내가 알고 있는 요시카와 에이지의 무사시가 사라진 듯 해 흥미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나마 전권이 갖춰진 ‘배가본드’는 내 마음을 흔들었고, 독서를 끊은 지 오래인 나에게도 그리고 정운이에게도 부담 없는 만화가 좋다고 생각이 든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우리는 사장님의 배려 속에 조용한 사무실에서 ‘배가본드’를 읽었다. 타케히코의 문장을 소리 내어 읽으며 그냥 눈으로만 봤던 그의 책들이 참 많은 것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17년간 그리고 있는 미야모토 무사시. 그는 그 속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싶은 것이었을까?

배가본드는 어느 정도 읽을 무렵 정운이는 자신은 소설을 써 보고 싶다고 나에게 말을 했다. 무언가를 향해 전력으로 도전한다는 것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바랬던 바 아닌가!

난 며칠 뒤 노트와 필기구를 사서 정운이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가 글을 쓴다면 좋을 거라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검을 향해, 천하무적을 향해 달려가는 무사시를 보며 나 역시 몸을 단련하자 마음 먹고 직장 근처 수영장을 끊었다. 7시 ~ 8시까지 수영을 하기 위해서는 5시반에는 집에서 나가야 했다. 수영장에 가서 기초 수영을 배우며 잠도 밀려오고 피곤한 마음에 하라는 수영은 되지가 않고 물 속으로 자꾸만 가라 앉는 나를 발견했다. 어느 날은 나무토막처럼 둥둥 떠 다니기도 했다.

그런 동안 사장님은 정운이가 일 하다가 잠깐 쉬는 시간이면 하늘을 보며 중얼거리며 노트에 열심히 뭘 적더라고 얘기해 주었다. 내심 기대가 되었던 나는 정운이에게 한, 두 달이 흐를 무렵 무얼 그리 적고 있냐고 물어 보았고. 정운이는 연애 소설을 쓰고 있다고 했다. 3부작으로 구성 중인 데 그 첫 번째 작품의 제목은!

‘네 건방진 입술을 뺏어봐!’

내용은 건방진 아가씨의 입술은 순수한 청년이 뺏어간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조용한 사무실에서 자신의 소설을 낭독하는 정운이에게 뭐라 대꾸할 말이 없어 조용히 듣기는 했는데 여자 대사를 할 때는 여자 목소리를 내는 정운이를 보며 감정 안 넣어도 이해하니 이상한 여자 목소리 내지 말라고 멱살을 잡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됐든 말을 잘 못하는 것과 다르게 이야기도 논리적이고 잘 쓰는 정운이가 대단한 생각이 들어. 한번 연애 소설 사이트 같은 곳에 올려 보자고 했고, 우리는 글을 올린 후 그 반응이 기대가 되어 설레는 마음을 품은 채 며칠 기다리며 댓글을 기다리기로 했다. 며칠 뒤 사이트를 열어본 우리는 100여개의 댓글 수를 보며 이러다가 소설가로 책 출판 하는 거 아니냐며 자축을 하고, 댓글 내용을 보았는데.

‘똥구멍으로 글을 쓰냐’

‘아주 지랄도 풍년이다.’

‘입술을 뺏는 게 왜 주제냐. 도대체 무슨 의도로 글을 쓴 거냐’

엄청난 악플의 현장을 목격했고.

가장 나은 댓글은

‘그래도 쓰느라 고생했네요.’

댓글을 다 보며 우리는 말이 별로 없었고, 정운이는 고개만 하염없이 숙이고 있었다.

그 때 난 요시카와 에이지의 무사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정월, 모두 새해를 맞이해 분주하던 날. 무사시도 무사 수행 중 이었으나 가족이 그리워 자신의 이모가 보고 싶어졌다. 추운 밤 배가 고픈 무사시는 이모를 찾아 갔다. 늦음 밤에 찾아간 이모는 오랜만에 만난 무사시에게 소문에 ‘너가 흉폭하다’ 하며 곳간이라도 좋으니 재워달라는 무사시에게 차갑게 집에서 재워 줄 수는 없다며 먹던 떡 2개를 싸서 무사시에게 쥐어 주었다.

무사시는 그 얼은 떡을 먹으며 잠도 못 잔 채 거리를 나와 새벽에 강가에서 찬 물로 목욕을 하며 스스로 외쳤다.

난 여기서 정운이에게 말했다. 이 부분이 중요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곤경에 빠질 수 있지만 그걸 어떻게 받아 들이냐가 중요하다고 말이다.

무사시는 검으로 인생을 찾겠다는 자신이 잠시 사람의 정이 그리워 찾아가고 이런 대접을 받았다고 약해져 있다니 아직도 자신은 멀었다며 반성을 했다.

사무실 형광등 불빛 아래서 정운이를 향해 손을 펼치면 열변을 토하는 내 자신!

우리는 스스로를 단련해 보자고 글을 쓰는 것이 아닌가? 댓글이 무어냐! 우리를 모르는 사람이지않는가. 무사시는 검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찾아갔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위에서 뭐라 한다고 못났다고 금방 풀이 죽어 글 쓰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가! 그래! 똥구멍을 쓴다고 하면 똥구멍도 좋다. 써보자! 한번 써보자! 다 쓰자! 계속 써 보자!

사무실에서 큰 소리가 나자 뭔 일인가 달려온 양동이 든 사장님도, 멍하니 눈을 깔고 있던 정운이도 신들린 듯한 나의 목소리! 하늘을 향해 일직선으로 솟은 듯한 소나무와 같은 나의 팔 놀림. 게다가 난 내 말에 내가 취했다.

이름 모를 감동이 우리 세 명을 덮쳤고, 사장님은 또 말 없이 냉면을 시키셨다. 정운이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쓰기를 결의하고 말이다.

정운이와 <배가본드>를 읽으며 미야모토 무사시도 우리도 인간. 그가 걸었던 그런 집념의 길이 그리고 그런 열정이 우리 안에도 다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란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각자의 내면의 무사시가 있다. 그가 천하무적의 길을 걷든, 아니면 그런 것들을 아지랑이로 보든. 어떤 벽을 향해 전심전력으로 움직이고 모든 것을 다 연소시키고 싶은 그런 마음. 그걸 발견하고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내 안의 무사시의 싸움이지 않을까. 인생이라는 전쟁터에서 말이다.

무사시. 그것은 하나의 인격의 이름일 것이다. 그를 통해 내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도 같은 무사시가 있기에 밖에 타케히코를 통해 보여진 무사기가 내 안의 무사시를 자극하는 것은 아닐까?

 

배가본드 20편의 작가의 말

인연이란 참으로 오묘한 것이다. 사람과의 인연 소설이나 만화와의 인연 한 편의 영화나 한 곡의 노래와의 인연 자신이 진심으로 원했을 때. 그것들은 마치 미리 알기라도 하듯 거기에 있다. 그런 것들이 나를 살려준다.

 

그러하다. 참으로 그러하다.

 

우리는 <배가본드>를 읽으며, 스스로의 나약함을 비웃었다. 그리고 이노우에 타케히코가 그리는 무사시의 유튜브 동영상을 보며 그의 집념에 감탄을 했다. <고백>이라는 타케히코가 미야모토 무사시를 휴재하는 동안 인터뷰한 글들이 출판된 것도 있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리얼’이란 만화는 그릴 것이 정해져 있고 생각할 필요가 없듯 그대로 그리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무사시는 다르다고 했다. 거기엔 소재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 자신이 찾아야 하고, 자꾸 창작해 가야 한다고 했다.

 

그의 글을 읽으며 저 작가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날 우리는 <배가본드>의 한 주인공 마타하치의 어머니 혼이덴 할머니가 죽을 때 자신의 아들을 위한 유언을 할 때 글을 읽었다.

 

흔들리지 않고 외길을 걷는 모습은 아름답다.

하지만 보통 사람은 꼭 그렇지만도 않은 법.

헤매고...

실수하고...

멀리 돌아가기도 하지.

그래도 좋아.

뒤를 돌아보렴.

여기 부딪히고 저기 부딪히고 이리저리 헤맨 너의 길은...

분명 누구보다도 넓을 테니까.

지나온 길이 넓은 만큼 너는...누구보다도 다른  사람에게 너그러울 수 있는 게야.

나도...무사시도...되지 못한 인간이 될 수 있을게야.

 

마타하치..

이 세상에 강한 사람 같은 건 없단다.

강해지려고 발버둥치는 사람...

있는 건 오직 그 뿐이야.

약한 사람은 자기를 약하다고 하지 않지.

너는 이미 약한 자가 아니란다.

강해지려고 노력하는 자.

이미 그 첫걸음을 뗀 게야..

내가 뭐랬니?

너의 미래는 활짝 펼쳐질 거라 했지?

여덟 팔자 모양으로

지지마라. 마타하치. 지지마!

 

지지마라 마타하치 지지마를 읽는 데 정운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마치 자기에게 한 소리처럼 들렸다고 한다. 자신은 약하고 한 없이 나약하고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마타하치처럼 부모님께 칭찬 받기 위해 거짓말도 많이 하고 말이다. 나 역시도 똑같았다. 만만치 않은 허풍의 거성을 쌓았다.

 

우린 그 후 약하지만 지지 않으려고 노력해 갔다. 정운이는 작년 겨울, 고물상에서 일하며 다닌 장애인 센터에서 여자친구까지 사귀었다. 속으로 정운이는 연애능력은 나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을 했다.

 

정운인 열심히 글을 쓰고, 난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 중이다.

 

고물상 동지들은 나에게 엄청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1년 그랬듯이,

나아가자. 난 O시의 미야모토 무사시다!

지지마라! 루쉰p! 지지마!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