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책(?)이 그렇겠지만, 특히나 여행 책은 텔레비전은 우리를 어쩌고 하면서 시작하는 광고처럼 우리를 순식간에 낯선나라, 낯선 도시로 인도하고 새로운 경험을 체험하게 만듭니다.
그건 다른 장르의 책들보다 여행 책이 작가, 여행자의 목소리를 마치, 여행에서 막 돌아와 가방도 풀지 않은 친구에게서 후일담을 듣는것 처럼 가깝게, 생생하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텔레비전을 끄거나,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혼자 박장대소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때와 비슷한
공허함, 외로움도 여행 책이 가장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건, 여행 책을 읽고 마음과 몸이 동하고 뜨거워져서, 급하게 달력을 넘겨보고 통장잔고를 확인하지 않더라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간단한 짐을 챙겨 공항으로 혹은, 터미널로 향하지 못할 이유가 서너 가지쯤 생각 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한마디씩 하죠. '그래, 다음 달에' 혹은, '다음 휴가 때' 아니면, '내년에' 라고...
훌쩍 떠난다고 세상이 뒤집히는 것도 아니고 통장이 그야말로 빵구(!)가 나는 것도 아님은 물론이고 뒤따라 생각나던 수많은 이유들도 사실은 시급을 다투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고 나면 내가 생활을 해가고 있는 것인지 생활이라는 굴레에 갇혀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마음이 복잡해 집니다.
그런 (늘 묶여있고 갇혀있는) 마음에 가볍게(?) 떠나라고 그래도 좋다고 말해주는 책을 만났습니다.
시간이나 돈을 모으지 않아도, 그렇게 모은 시간과 돈, 여행 가방보다 무거워진( 드디어 떠난다는 설렘으로) 마음을 가지지 않더라도 떠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삶이 어떤 순간 스스로를 배신한다고 느낄때, 어느 날 불쑥, 직장 생활의 쓸쓸함에 마음은 물론이고 온몸 마져 쑤셔올 때, 오래간만에 만난 옛 친구의 상처를 보게 되었을 때, 유년시절 형제, 자매에게 느꼈던 아집과 질투의 한토막이 여전히 내 몸에 남아 있다는 것을 느낀 그 어떤 날
시간과 마음, 돈을 모으지 않고도, 무거운 여행가방 없이도 떠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덧붙여, 여행을 하는 데는 돈을 많이 들여, 특별한 곳, 맛있는 식당을 순례하는 것보다 삶을 교환하고 인사하고 예의를 지키며 관계 맺는 것이 여행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고 말입니다.
제주 풍경화(風景話)는 제목 그대로 제주의 바람, 경치, 41개의 장소에 담긴 50여가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두 계절 이상, 일만 시간 이상을 그곳에 머물며 직접 밟아 본 제주의 맑은 바다와 제주도 그 자체인 한라산, 수백 개의 오름과 오래된 신화, 현대사의 고갱이, 생채기가 선연히 남아 있는 제주의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놓습니다.
최근, 제주도에 관련된 책들이 많이 나왔고 그 숫자만큼 다양한 제주(여행 코스)를 말해 우리의 선택을 넓혀 줬지만, 이 책은 차의 속도로는 필연적으로 놓치게 되는 세세한 풍광, 구불거리는 길을 따라 정류장마다 쉬어가며 천천히 달리는 버스나, 타박타박 자신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걸어야 만날 수 있는 (제주도의) 내면, 정해진 코스나 어떤 지점의 완주를 목적으로 두지 않으며, 동사무소도 대로도 없는 작은 마을, 그곳에 붙박여 사는 섬사람들의 이야기를 성실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위기에 처한 친구에게 '들려'주었다던 (제주)소리의 황홀을 우리에게도 들려줍니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제주에서 가볼 만 한 곳은 헤아리지도 못할 만큼 많고, 착한 여행을 권하며 식물도 생물이므로 정해진 길로만 다닐 것을 당부하지만, 이 책에서 소개한 혹은, 다른 곳에서 들려준 제주 말고 직접 가보고서 더 많은 곳, 더 많은 길을 발견하길 바라는 마음을 남깁니다.
이제 우리, 내가 해야 할 일은 책과 생활의 굴레를 털고 떠나는 것!
바람이 불어오는 곳....
삽시간의 황홀, 제주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