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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좋아요.
  •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 페터 한트케
  • 7,200원 (10%400)
  • 2009-12-11
  • : 2,778

이 책은 서명에서 풍기는 이미지와 내용이 사뭇 다른 책이다.

해고 됐다는 착각 - 우발적인 살인 - 도피 - 여성들 - 단어들의 나열

간략하게만 보면 위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블로흐라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과거에 유명한 골키퍼였지만 지금은 건축 공사장에서 조립공을 일하는...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고 국경근처로 도망치는 아주 간단한 이야기지만 주인공이 바라보고 있는 풍경의 묘사가 아주 세세하고 사실적이라 마치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영상에 담긴 풍경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되는 책이다.


이 책은 언어유희가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한번 읽고 두 번째 다시 훑으니 아래와 같은 언어유희와 관련된 내용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시마르크트로 돌아와 가게들 뒤에 아무렇게나 쌓아 놓은 텅 빈 과채 상자들을 보고 있자니 재미있는 익살을 보는 듯했다. '무언(無言)의 위트!'하고 생각했다. 블로흐는 무언 풍자극을 즐겨 보았다. 19쪽


그는 이제야 비로소, 마치 강제로 하는 것처럼, 모든 대상에 대한 단어를 생각하게 되었다. 대상을 보면 단어가 떠오른다. 56쪽


너무 피곤해서 그런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대상들 가운데서도 마치 윤곽만 존재하는 듯 윤곽을 우선 보았다. 그는 모든 것을 이전처럼 단어로 옮기거나 언어유희로 파악하지 않고 직접 보고 들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그러한 상태에 있었다. 100쪽


'다시 마을로, 다시 여관으로, 다시 방으로. 전부 아홉 단어군.'하고 블로흐는 가벼운 마음으로 생각했다. 75쪽


주의해서 생각하자 단어가 하나씩 하나씩 쉽게 머리에 떠올랐다. 비가 올 듯한 10월 어느 날, 이른 아침, 먼지낀 창유리. 완전하게 작동되고 있었다. 76쪽


화창한 낮에 혐오스러운 언어유희병이 그를 엄습했다. 88쪽


그가 바라보는 주위 풍경들은 글자의 형상으로 그의 눈에 확 들어와 박혔다. '호출 부호 같군.'하고 블로흐는 생각했다. 지시문 같은! 그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져서 나타났다. 92쪽


너무 피곤해서 그런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대상들 가운데서도 마치 윤곽만 존재하는 듯 윤곽을 우선 보았다. 그는 모든 것을 이전처럼 단어로 옮기거나 언어유희로 파악하지 않고 직접 보고 들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그러한 상태에 있었다. 100쪽


나는 언어유희라고 하면 유머러스하다고 생각했다. 또 단어를 모으거나 단어에 집중하는 행위는 착하고(?) 내면이 깊은 사람들이 하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한강의 <희랍어 시간>을 읽을 때 느낄 수 있는...


그렇지만 한트케는 나의 그런 편견을 한번에 깨부신 사람이다.

한 인간의 불안한 심정을 언어유희로 표현한 그 기법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정신분열 같기도 하고 ADHD같기도 하고... 아니면 AI가 탑재된 기계인간 같기도 하고...

뭔가 혼돈스럽지만 그의 뇌 속에 내가 들어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단어들의 나열, 접속사의 선택, 문장의 선후관계까지 계속해서 생각하고 생각한다.

블로흐적 사고가 이 책을 읽는 오늘 하루 나와 함께 하는 경험을 했다.


독자들의 이런 반응을 작가가 원한 것이라면 단연코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은 우리가 아는 문학과는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Brand new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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