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킹의 소설은 언제나 롤러코스터 같다.
우선 특유의 삐딱한 B급 유머를 섞은 편안한 말투로 재미있는 인물, 시선을 확 잡아끄는 인상적인 오프닝과 함께 현실에 반드시 있을 법한 이야기를 주절주절 풀어놓으며 시작한다.
그러다 아주 무난하게 출발하며 작품 속에 푹 젖어들게 만드는 바람에
정신 못차리고 빠져 있는 사이 어느새 숨막히는 위기가 시작오고, 이야기가 클라이막스를 향해 치닫기 시작하면 호흡 곤란에 빠져드는 순간이 닥쳐온다.
<미스터 메르세데스>는 그런 '롤러코스터로 미친 널을 뛰는' 기분을
제대로 맛볼 수 있게 도와주는 작품이다.
레이먼드 챈들러에 대한 동경을 여러 차례 내비친적이 있던, 이 뛰어난 작가는
탐정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면서도 무턱대고 동화되어 섣부르게 흉내를 내는 대신에
자기 색을 고스란히 끌고 들어가, 전혀 색다른 느낌의 '신개념 하이브리드 탐정 소설'을 선보인다.
물론 탐정 소설 본연의 기능에 걸맞게 탐정(=형사)가 등장하고, 사건이 있고, 단서를 짜맞추고, 추리를 하고 범인을 뒤쫓고 사건도 해결한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은 <공포의 제왕>으로 잘 알려진, <스티븐 킹> 본인의 세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미 너무 많이 봐 온 장르의 소설임에도 전혀 식상하거나 뻔하지 않고 아주 신선하고 흥미진진하다.
우선 언제나 시선을 확 잡아 끄는 인상적인 오프닝을 즐겨 쓰는 작가답게
(여고생들의 샤워실에서 갑자기 시작되는 초경 - '캐리'
의식을 잃고 있다가 서서히 깨어나면서 사이코 집착녀와 마주하게 되는 작가 - '미저리'
갑자기 추락하는 경비행기, 잘려나간 사슴의 목, 잘려나간 마을 주민의 손목 - '언더더돔'
아내를 미친듯이 두들겨 패서 유산시키고 멀쩡한 척 하는 남편 - '로즈 매더'
핸드폰으로 통화하던 사람들이 속속들이 쓰러지고 죽어나가는 사건 -'셀' 등)
안개 낀 어스름한 새벽, 취업 박람회장 앞에서 줄을 서 있으면서도
비참한 지금의 처지를 서로 배려하는 것으로 잊어보려는 따뜻한 인물들을 등장시켜
잠시나마 웃게 만들더니 순식간에 12기통짜리 메르세데스 벤츠를 이들 위로 돌진시켜 곧바로 피비린내 나는 공포 바람을 일으키는 솜씨가 아주 절묘하다.
은퇴한 무기력한 형사, 사이코패스 또라이 범인 (얼핏, '사이코'의 노먼 베이츠를 연상케 한다)의 대립은 사실 엄밀히 말해서 온갖 형태로 확장되고 변주되었던 장르 소설의 세계에선 별로 신선할 게 없는 조합 같긴 하지만, 이 역시도 킹의 손길이 닿으면 조금 달라진다.
단서와 문제 해결에 급급해서 간혹 인물을 간과하기 쉬운 여타의 추리소설들과 달리,
킹은 각각의 인물에 적당한 당위성과 지극히 현실적인 습관, 배경을 부여하여
아주 생생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를 창조해낸 것이다.
사족에 가까운 장황한 설명 없이 간단한 정황과 독백, 행동만으로도
한때 잘나가던 형사, 빌 호지스의 무기력한 두뇌가 자극을 받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을, 보통 사람으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괴상하고 비틀리고 몹시 기괴한 브래디 하츠필드의 세계를
손에 잡힐 듯이 가깝게 느낄 수 있다.
그래서일까?
<필립 말로>를 연상케하는 로맨스 코드나, '삐딱한 탐정 모자' 같은 작위적인 요소마저도
모두 장르 소설에 바치는 킹의 유머처럼 정겹고 어딘가 유쾌하다.
이전에 킹이 선보이던 '공포'의 세계에서는 사실,
'모든 일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던가?'하는 요소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왕따 소녀는 염력을 타고 난 거고 ('캐리')
가족을 죽이는 미친 알콜 중독자 가장은 사악한 호텔의 기운에 조종당하게 된 거고 ('샤이닝')
죽은 동물을 묻으며 살아 있는 좀비로 변해 돌아오는 인디언 묘지는 저주를 받은 장소였을 뿐이고 ('애완동물 공동묘지')
행동이 이상해진 마을 주민들은 외지에서 이사온 뱀파이어에게 공격당한 것뿐이다. ('살렘스 롯')
공포 소설에서는 일이 일어나게 된 '설정'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었다면
탐정 소설이라는 장르에서는
'범인은 누구인가'와 '어떤 방식으로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인가'하는 추리를 빼놓을 수 없다.
킹은 추리 소설의 견고한 외피 속에 전매특허인 공포를 조심스럽게 주입하는 방식으로 이 장르에 도전하여, 멋지게 독자들의 기대를 충족시킨다.
아예 애초부터 속시원하게 범인이 누구인지, 어떤 놈이고, 왜 그랬는지를 보여주면서 자기 방식대로 이야기를 끌고가는 동시에 그 놈이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훔친 메르세데스를 움직여서 사람들을 죽였는지, 그리고 앞으로 그 또라이 같은 머리로 도대체 어떤 가공한 범죄를 저지르려는 계획인지를 추리해가며
빌 호지스가 과연 그를 제대로 막아내고 잡을 수 있을 것인지 그 과정을 롤러코스터 위에 앉은 독자들을 뒤흔들어가며 절묘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범인을 먼저 보여주고, 그의 수법을 되짚어 나가는 방식이나
범인의 세계와 형사의 세계가 서로 각기 움직이다가 서서히 만나게 되는 방식 등이
이미 장르 소설의 세계에서 익숙한 수법이라해도,
인간의 마음 속에 서서히 공포가 피어오르도록 하는 이야기에 일가견이 있는 작가가
작정하고 달려들어 매만지기 시작하면, 사정은 전혀 달라진다.
그것도 아주 '킹'스러운 조연들과 함께 말이다.
탐정 소설에 조력자로 등장하기 마련인 '탐정의 비서' 혹은 '정보원'들은,
이 소설에서는 17세의 똑똑한 흑인 소년과 정신이 좀 왔다갔다하는 약물치료 환자인 40대 여인이다.
그야말로 '킹'스러운 인물들이 탐정 소설의 공식대로 움직이는 걸 보는 신선함이란!!
이들 평범한 듯, 범상치 않은 인물들은 킹이 만들어놓은 세계 속에서 부산스럽게 뛰어다니며, 단서를 주워모으고, 컴퓨터 해킹을 하고, 탐문 수사를 벌인다.
그리고 모든 것이 어설픈 이들 3명이 덤벼든 사건이라서,
상황은 더욱 무섭고, 해결 과정은 더욱 위태롭고, 소설은 흥미진진해지는 것이다.
절반쯤까지는 반쯤 웃어가며, 반쯤은 감탄해가며 재미있게 봤다면
문득 정신을 차리고보니 어느새 숨통을 죄어오며 발을 동동구르게 만드는 클라이막스에서는
그야말로 팡팡 터지는 긴박한 상황이 이어지는 바람에 헉! 하고 숨도 못쉬고 몰입해서 나머지를 읽어나갔다.
의외의 반전이 터지는 부분에서 사건이 꼬이게 되는 설정이
다소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어서 옥의 티라고 생각되지만.
하지만 그런 크고 작은 약간의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미스터 메르세데스>는
결코 후회없는 재미와 감동을 보장하는 작품이다.
B급 공포의 외피 속에도 인간 본연에 대한 성찰과 사회적 문제점에 대한 지적을 매끄럽게 녹여냈던 킹 답게, 하드보일드 추리소설 속에도 뭉클함은 살아 있다.
사이코패스 범인의 과거사에도,
잘나가던 형사의 회한 속에도,
조연급 인물의 개인사 속에도 한번쯤 되짚어 볼만한 인간미가 들어 있어 더욱 매력적이다.
'한물 간 중년의 뒤늦은 활약' 이라는 점도 이 소설의 독자층이 좀더 넓어질 수 있는 요인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게다가 '꺼진 불과 죽은 시체도 다시 되돌아봐야한다'는 식의 공포 소설 작가다운 마무리는 정말 마음에 쏙 든다.
빌 호지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이 두 편 더 나와 '3부작'을 이룰 예정이란 건 알았지만
그런 식으로 마무리 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덕분에 2편 "Finders Keepers"를 기다리느라 잠도 못 이룰 것 같으니,
공포든, 기다림이든 이래저래 밤잠 설치게 만드는 것도 이 작가의 특기라면 특기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