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많고 힘든 일상을 살다가 가끔 한번씩 정신차리고 지금을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내게는 스티븐 킹의 신간과 만나는 때가 바로 그런 순간이다.
힘들고 지치고 괴로운 현생을 살다가도 그의 신간 소식을 듣고 냉큼 손에 넣어 읽다보면 문득, '아직 이 양반이 우리 곁에, 그것도 이렇게 멀쩡한 필력을 자랑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하게 있다니 이게 무슨 복이냐' 싶어서 감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중편집 <피가 흐르는 곳에>의 출간은 몹시 반가웠다.
팔불출 팬인 나로서는 그가 쓰는 모든 작품이 다 걸작이지만,
냉정하고 꼼꼼한 킹 매니아들 중에는 간혹 그가 장편보다는 '중단편에서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작가'라는 평이 있을 만큼
그의 짧은 소설들은 확실히 읽는 재미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 한다면?' 이라는 상황에서 출발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작가이기 때문인지 흥미로운 상황, 그 자체가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그의 중단편들은 짧은 분량안에 기승전결에 반전까지 녹아 있는 임펙트를 자랑한다.
총 4개의 이야기가 실린 이번 중편집 역시 '이야기' 그 자체를 중시하는 작가답게 명불허전, 확실하게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1. 해리건씨의 전화기
네 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스티븐 킹식 공포'를 전해주는 작품.
킹의 전매특허인 'B급 감성과 A급 필력이 만나는' 섬뜩한 이야기이다.
'무덤 속에 묻힌 전화기가 울린다면? / 혹은 관 속에 누워 있는 죽은 자에게 전화를 건다면?' 이라는 애들 괴담같은 설정에서 출발한 작품이지만,
꼼꼼히 살을 붙여나가는 덕에 소년과 노인의 만남, 두 사람의 우정이 발전하는 과정 그 자체를 보는 것도 아주 즐거웠다.
그런 능숙한 솜씨 덕분에 중반부 이후, 소년이 죽은 노인에게 연락할 때마다 벌어지는 오싹한 일들을 꽤 실감나게 즐길 수 있다.
그야말로 입을 헤 벌리고 킹이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에 빠지는 기분이 드는 소설.
2. 척의 일생
처음엔 상당히 정적인 느낌이라 임펙트가 조금 약한 작품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시간 역순으로 진행되는 소설을 따라가는 동안 깊이 빠져들었다.
4개의 작품 가운데 가장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하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의문의 광고판에 등장하던 '척'이라는 남자의 일생을 거꾸로 되짚어가며 보여주는데 결국 지금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병원 침상에 누워 있는 이 남자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순간 몇 가지를 통해 보여준다.
그리고 당연히 스티븐 킹이 창조한 인물답게 평범하지 않은, '초자연적인' 요소가 들어가는 지점이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 흥미를 더해준다.
3. 피가 흐르는 곳에
이번 중편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소설.
킹의 이전작에 등장했던 인물이 다시 등장해서 문제를 해결하는데
배경이 되는 크리스마스 시즌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약간 '외전' 같은 느낌으로 아기자기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다.
그의 이전작인 '빌 호지스 삼부작' (미스터 메르세데스, 파인더스 키퍼스, 엔드 오브 왓치)과 '아웃사이더'를 읽었던 독자들이라면 당연히 특별 선물같은 느낌으로 즐길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독자들이라도 살짝 어리둥절할 망정 작품 전체를 즐기는 데 큰 무리는 없을 듯 싶다.
워낙 기승전결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4. 쥐
막상 읽어보니, '다음 이야기가 어디로 튈 지 알 수 없는' 소설이라 아주 쏠쏠하게 읽는 재미가 있었다.
의외로 쥐는 거의 뒷부분에서야 등장하고, 2/3 지점까지는 킹 자신을 투영한 듯한 작가 겸 교수 드류의 이야기가 편안하게 술술 이어진다.
킹 자신의 에세이에서 등장했던 집필 작업과 관련된 이야기와 일치하는 부분들이 많아서 꽤 재미가 있었고,
머릿속에 떠오른 '대작 아이디어'를 얼른 글로 옮기고 싶어 안달난 드류가
의외의 방해요소들 - 아내의 반대, 몸살기, 갑자기 닥쳐온 태풍 - 때문에 고통받는 전개가 이어지며 과연 소설을 완성할 수 있을지 궁금해져서
숨죽여가며 다음장을 넘겼다.
쥐를 활용한 '확실한 공포'를 예상하던 독자라면 약간 허무한 결말일지도 모르지만,
나름 소설과 작가, 그리고 작품을 완성시키도록 돕는 뮤즈, 혹은 어떤 초자연적인 힘에 관한 은유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꽤 신박한 '잔혹 동화'같은 마무리라 나름대로 독특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