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티븐 킹의 신작, <인스티튜트>는 폭죽을 매달고 달리는 롤러코스터에 탑승한 것 같은 기분을 맛보게 하는 소설이다.
분명 목이 이리저리 꺾일만큼 아찔하고 정신없는 스릴을 맛보게 해 주지만,
롤러코스터의 특성상 우선은 삐걱대는 음산한 소리와 함께
오르막길을 감질나게 슬금슬금 올라간 이후에야 아래로 신나게 내달릴 수 있는 것이다.
두 권으로 나눠진 이 소설의 1권은 그런 롤러코스터의 오르막길쯤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신나게 내달릴 후반부를 위해서 핵심 인물들의 사연이 공들여 소개되고, 주인공이 겪는 속터지는 고난이 차곡차곡 쌓인다.
다만 평범한 오르막길이 아니라, '꽁무니에 불을 붙인 폭죽이 달린 롤러코스터'답게
타 들어가는 도화선을 지켜보는 불안함과 긴장감이 점점 배가되는 재미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 1권의 매력이다.
그리고 1권 안에도 나름의 기,승,전,결이 모두 존재하기 때문에
제법 완성도 있는 두근거림을 맛볼 수 있는데다, 1권이 딱 끝나는 지점이 아주 절묘하기 때문에
곧바로 2권을 펼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인스티튜트>는 '쇼생크 탈출의 21세기 버전' 같은 작품이다.
(혹은 '캐리의 쇼생크 탈출' 정도로 농담을 할 수도 있겠다. ㅎㅎ)
'약자인 주인공이 거대 권력에 잡혀 갖은 고초를 겪다가 자신의 지략과 주변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권력에 맞서 싸우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엄청난 시놉의 주인공은 무려 12세의 꼬마이지만, 어른을 능가하는 지능을 가진 천재 소년 루크. 게다가 아주 미미한 염력도 갖고 있다.
능력은 뛰어나지만, 아이라는 한계성 때문에 강점과 약점을 고르게 갖고 있어서
그가 당하는 온갖 고초와 힘겨운 탈출 과정이 흥미진진해지는 것이다.
부모님과 함께 평온한 일상을 보내던 이 소년은 어느날 밤 갑작스럽게 닥친 괴한들에게 납치되어 비밀스러운 시설에 감금된다.
그와 비슷하게 초능력을 가진 아이들이 수용된 이 시설에서는 고문에 가까운 실험을 통해 아이들의 능력을 컨트롤하고,비밀스러운 임무에 투입한다. 그리고 당연히 이런 일을 겪는 아이들의 정신이 끝까지 온전하게 유지될 리 없다.
사실 '초능력 소년의 납치와 탈출'이 기본 줄거리라는 걸 알고 책을 펴들었는데
초반 1/3 정도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바람에 살짝 어리둥절했었다.
시작부터 뜬금없는 인물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다만 첫장면부터 꽤 호기심을 자극하는데다,
이 인물의 인생 역정과 행보도 심상찮기 때문에 나중에는 이 사람의 이야기에 푹 빠지게 되면서
완벽하게 소설 속 가상 세계에 젖어들게 된다.
지금 읽고 있는 이 인물이,
주인공과 나중에 어떻게 얽히게 될 지, 작품의 메인 줄거리에서 어떤 축을 담당하게 될 지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추측하는 재미가 생기는 것이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오르막길을 올라가는 롤러코스터처럼 1권은 그렇게
납치되어 낯선 장소에서 눈을 뜨고, 수용된 아이들과 친해지는 루크,
초능력을 가진 다른 아이들의 캐릭터와 관계성, 수용소에서 자행되는 온갖 고문, 실험 등이 차근차근 등장한다.
그리고 멋모르고 당하기만 하던 약자가 마침내 각성하고 탈출을 결심하는 부분부터 롤러코스터의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루크의 탈출 자체는 예견된 일이라 스포라고 할 수 없겠지만,
탈출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는 자잘한 과정들과 결국 성공할 걸 알면서도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게 만드는 백전노장 작가의 솜씨가
한여름 독서에 딱 걸맞는 진땀나는 긴장감을 더해줘서 숨쉴 틈도 없이 몰입해서 읽었다.
그리고 마침내 2권으로 넘어가면,
그동안 힘겹고 불안하게 오르막길을 올랐던 롤러코스터가 신나게 내리막길로 돌진하기 시작한다. 뒤에 매단 폭죽을 요란하게 터뜨리면서 엄청난 속도로.
탈출을 감행한 루크의 뒤를 무서운 속도로 추격해오는 비밀 시설의 사람들,
루크를 도와주는 사람들과 시설에 갇힌 아이들의 격돌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수많은 작품이 영상화된 작가답게,
스티븐 킹은 자잘하고 빠른 장면 전환으로, 동시에 여러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과 시간별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 여러 사람들의 마음 속을 왔다갔다하면서 긴장감을 높인다.
가장 감탄했던 것은 <닥터 슬립>에서도 보여줬던 것처럼
'타인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초능력'으로 싸우는 전투 장면을 아주 실감나게 그려냈다는 것.
영상이라면 각종 CG를 범벅해서 그럴듯하게 그려낼 수도 있겠지만,
쉽고 심플한 단어와 비유들만으로도 눈에 보일 듯 생생하고 숨찬 장면들을 묘사해내는 능력이야말로 작가 스티븐 킹이 거둬들이는 엄청난 수입의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본적으로 킹의 팬이라는 입장에서 '팔이 안으로 굽는' 서평을 쓸 수 밖에 없긴 하지만
이 작품은, 기존의 장르 소설 매니아들 뿐 아니라, 요즘처럼 답답하고 희망이 없는 나날 속에서
현실을 잊고 몰입할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독자들에게도 부담없이 추천할 수 있을만한 소설이다.
그저 킬링 타임용이라고 생각했던 장르 소설을 읽으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지점,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내 일상을 일깨워주는, '각성하고 희망을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만나는 순간의 만족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