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연수 작가님, 소설에서만큼은 아재 개그 자제 부탁이요.
예시 : "엄마한테 안산 쪽에 무슨 연고가 있었나?" "연고는커녕 반창고도 없지." (P131)
2. 좋았던 단편과 별로였던 단편이 극명하게 나뉘었던 소설집.
3. 일단 표제작 '사월의 미, 칠월의 솔'부터. 이 단편은 실망스러웠다.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인 팸 이모 때문. 종이 위에 쓰여진 인물 같다고 해야할까. 대사나 이런 것들이, 너무 소설적이고 영화적인 느낌. (나이 60의 할머니라는 설정만 아니었다면 그냥 그러려니 읽었을 지도...) 그래서인지 팸 이모라는 인물에게 몰입하기가 힘들었다. 말미에 등장하는 정감독의 아들도 마찬가지. 사춘기 시절, 아버지 내연녀의 정수리를 보고 슬픔을 느끼는, 그런 성인(聖人)이 이 지구 상에 존재한다니. 맙소사. 이 무슨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결말인가.
4. 가장 좋게 읽은 단편은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 소설은 "인간은 과연 어디까지 진실에 가까운 글을 쓸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과 답변을 어떤 노작가의 사랑 이야기와 함께 들려준다.
나는 내가 무엇을 쓰지 못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예컨대 내가 사랑했던 여자의 귀밑 머리칼에서 풍기던 향내나
손바닥을 완전히 밀착시켜야만 느낄 수 있는 어덩이와 허리 사이의 굴곡 같은 것들을
검은색 볼펜은 묘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볼펜을 쥐는 즉시 머릿속에서 줄줄 흘러나온 검은색 문장들이 아니라
쓰지 못하고 있는 빨간색 문장들을 써야만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나는 온몸에 남은 오감의 경험을 문장으로 표현해야 할 텐데,
그건 쉽게 문장으로 표현되지 않았다.
아무리 잘 쓴 문장도 실제의 경험에 비하면,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작가의 고통이란 이 양자 사이의 괴리에서 비롯했다.
빨간색 볼펜을 손에 들고 괴로워하던 나는
그 고통이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173)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내가 쓴 "24번 어금니로 남은 사랑"은 물론이거니와
어쩌면 나의 연애 전체가 거대한 환상에 기초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애가 거대한 환상이었다면 그 연애의 종말이 낳은 고통 역시 거대한 환상일 수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든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그녀가 사온 한 다스의 볼펜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는데,
그중에는 파란색 볼펜도 있었다. (P175)
이 파란색 볼펜으로 내가 쓸 수 있는 것은 어떤 문장들일까?
그건 비 내리는 새벽, 아무도 없는 동물원을 가득 메운 침묵 같은 문장들일 것이다. (P177)
5. "쭈쌩뚜니피니를 듣던 밤"은 이 소설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죽은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터널을 찾아가는 남매라니. 소재부터 참신했다. 펜을 꾹꾹 눌러 그린 그림 같은 후반부 내용도 예쁘고 또 슬펐다. "일기예보의 기법"은 소재와 내용이 다소 뻔하지만 (스푸트니크 2호와 라이카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유치했다.) 후반부가 살렸다. 미경이 짝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일부러 틀린 일기예보를 내는 대목에서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피식. "우는 시늉을 하네"는 이 소설집에서 내가 가장 아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바로 주인공의 아버지. 평범한 진심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착한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 요즘엔 그런 사람들이 내 가슴을 두들긴다. 너무 아플 정도로.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은 이 소설집에서 가장 경쾌하고 발랄하다. 하지만 내용은 정반대다. 저마다 각자 가지고 있는 내밀한 아픔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자세,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 어딘가 박민규가 떠오르는 문장과 구성이 썩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