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몇몇 단편의 단평.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 첫 장면부터 아름답다. 창밖에서 눈이 소복이 쌓여가는 강의실. 아무도 풀 수 없는 문제를 낸 물리학 교수. 그곳에서 저 혼자 답안지를 제출한 여제자. 누구는 이 소설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화자가 바뀐 미국판 '은교'라고.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감, 그것을 갈구하는 이들의 마음속에 나있는 어떤 깊은 구멍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강가의 개 : 가족은 선택할 수 없다는 딜레마. 그래서 가족은 가장 특별한 인연이 될 수도 가장 잔인한 낙인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이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테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가슴을 밀치는 듯한 장면들이 몇몇 있다. 주인공이 기억하는 형은 어떤 모습일까. 왠지 서럽게 흐느끼고 있는 뒷모습일 것만 같다.
-외출 : '스탠 바이 미' 사랑 Ver. (이 소설집 대부분이 그렇듯) 가장 중요한 서사는 주변 인물들의 드러나지 않은 진심이다. 각자의 위치로, 자신이 속해 있는 각자의 세계로 편입되어야 하는 어린 날의 여름. 그들의 이별은 호기심과 무지함 사이를 오고 가다 너무 쉽게 그리고 간편하게 이뤄지고 만다. 말로는 다 할 수 없었던 말들. 우연히 쏟아진 물컵 같은 감정들. 가장 좋았던 단편이자, 근래 읽었던 것 중 가장 습도가 높았던 사랑 이야기.
-머킨 : 여자 동성애자가 공공장소에서 가까이 두는 남자를 뜻하는 머킨. 소재가 독특하다. 하지만 더 인상적인 것은 섬세한 심리묘사다. 사랑에 상처 입은, 하지만 여전히 사랑받고 싶은 몸짓들. 그리고 마지막 장면. 말을 못 하는 소년 웅변가와 그 몸짓을 창밖 너머에서 바라보는 남자와 여자. 이 장면 하나 만으로도 이 단편은 정말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