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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거리

이 소설에서 김영하는 마치 자신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시험해 보는 듯 싶었다. 그는 소설 속에 과잉된 자의식을 꺼내 놓기보단 "거리"와 "속도"를 조절하는 조절자로서의 역할에 심의를 기울인 듯 싶다. 이야기 또한 어떤 인물이나 소재에 밀착하기 보단 전체적인 정경을 스냅사진 찍듯이 짧고 건조한 문장들로 솎아내었다.

 

2. 멕시코

김영하는 이 소설을 단순한 역사소설로 쓰지 않았다. 그는 더 포괄적으로 인간과 세계의 모습을 원초적인 형태로 담아내고 싶어 한 듯 싶다. 생존과 그를 위한 선택, 권력과 종교, 그리고 역사, 그 안의 혁명 그리고 전쟁, 남녀간의 사랑, 그리고 인생을 통과하면서 겪어내야만 했던 체념들, 마지막으로 "소멸"까지... 김영하는 이 모든 것을 멕시코란 황량하고 낯선 땅 위에서 펼쳐보이고 증발 시켰다. 마치 신기루처럼.

그래서 이 소설 속 멕시코는 하나의 완결된 세계처럼 보인다. 닫혀 있는 세계. 뫼비우스의 띠... 그래서 이 소설의 처음과 끝은 이어지는 걸까?

 

3. 소멸

진정한 소멸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의 존재는 무엇으로 유지되며 성립되는가. 나는 그 해답이 타인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각자가 살아가면서 얻게 되는 기억과 흔적들이 타인을 통해 더듬어 질 수 있을 때, 우리는 세계 속에 안착하고 자신을 선전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은 그렇지 못하다. 물론 미시적으로 바라볼 때 그들 각각은 타인이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바라볼 때 그들은 거대한 "소멸"이란 운명 앞에서 서로에게 타인이란 존재로써 타인은 되어 주지 못한다. 아니 그들 모두 "소멸"이란 운명 그 자체였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김영하는 그런 소멸의 과정에 매력을 느껴왔다고 작가의 말에 밝혔다. 그리고 그는 소설을 통해 과테말라의 석양 속에서, 유카탄 반도 어딘간의 에네켄 사이에서 모래바람처럼 흩어진 이들의 소멸을 그려냈다. 끝난 이야기로써가 아닌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될 그 언젠간의 이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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