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 표지만 보고는 웬 만화책인가 싶었다. 그러나 사실은 만화보다 더 만화 같은 공상과학 소설이 다루는 세계로 독자를 안내하는 비밀의 문임을 깨닫는다. 이 책은 지금의 세상을 하나의 거대한 공사 현장으로 바라본다.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이 바꿔놓은 우리의 생업, 신체, 감정, 윤리의 문제를 차근차근 짚으며 “세계가 망가졌다면, 우리는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까?”라고 묻는다. 과학·기술·사회를 함께 보는 STS (Science, Technology, Society) 관점에 SF 상상력을 더한 교양서이자, 과학기술 사용 설명서와 시민윤리 사용법을 한데 묶은 안내서이다.
18개로 낱개 포장된 각 주제는 등장인물보다 생각의 흐름을 따라간다. 각 장은 먼저 오늘의 기술 이슈를 사례로 설명하고(STS), 이어서 SF적 장면을 ‘생각 실험’으로 불러와 독자의 판단을 흔들어 본다. 마지막에는 정책·윤리·시민행동 차원의 질문과 점검목록으로 현실의 발판을 놓는다. 즉, ‘문제 제기→맥락화→생각 실험→실천 제안’의 흐름도를 따라간다. 이 단순한 리듬이 장을 거듭하며 꾸준히 쌓여 하나의 읽기 경험을 만든다. 읽다 보면 머리는 차분해지고, 손은 뭔가 해보고 싶어진다. 편집 방향도 분명하다. 다양한 자료로 전문성을 확보하되, 문장은 쉬운 말로 낮춘다. 핵심 키워드는 AI, 생명공학, 위험사회, 윤리, 연대 등 논란의 여지가 충분한 각종 사회 문제다. 본문 끝의 ‘생각거리’와 주제별 추천 도서는 다음 공부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계단 역할을 한다. 안내 표지판이 곳곳에 서 있는 셈이다.
가장 돋보이는 건 저자의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다. 저자는 과학기술을 ‘사실 모음’으로 가두지 않는다. 기술이 모든 걸 정한다는 생각도, 막연한 공포도 경계한다. 기술·사회·권력이 얽힌 매듭을 함께 보여 주며, 논의를 제도 설계와 삶의 규범으로 끌고 간다. 여기서 SF 상상력이 힘을 발휘한다. 추상적 개념을 일상의 선택지로 바꾸어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이어간다. 교실이나 독서 모임, 토론장에서도 곧바로 써먹기 좋은 구조다. 예를 들어 “AI와 돌봄 노동을 공정하게 설계하려면 최소 조건은 무엇인가?” 같은 질문은 읽는 즉시 과제가 된다.
이 책에도 한계는 있다. 첫째, 다루는 주제가 넓다 보니 장마다 깊이가 고르지 않다. 어떤 장은 날카로운 데이터와 사례로 설득하지만, 어떤 장은 아이디어 스케치에 가깝다. 둘째, 실천 제안의 촘촘함은 독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정책 실무자에겐 ‘초안’, 시민·교사·학생 독자에겐 ‘방향키’로 읽힐 수 있다. 셋째, SF적 사고실험은 상상에 불을 붙이는데 훌륭하지만, 경험적 근거를 중시하는 독자라면 검증의 빈틈이 보일 수 있다. 이 빈틈은 약점이자 장점이다. 독자가 스스로 채워야 할 여백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기술 낙관과 비관의 싸움에서 한발 비켜선다. ‘현실적 희망’이라는 말은 흔하지만, 책은 희망의 감정보다 방법을 찾는 데 집중한다. 시민적 상상력과 공동체적 실천이라는 오래된 단어를 오늘의 기술사회에 맞게 새로 다듬는다. 망가진 세계를 고치는 일은 거창한 수리보다 생활의 설계에서 시작된다는 메시지다.
문장은 평이하고 설명은 재치 있으며 결론은 과하지 않다. 덕분에 책은 “무엇이 옳은가”를 설교하기보다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할 것인가”를 묻는다. 독자는 읽는 동안 전문가가 되지는 않지만, 더 좋은 시민이 될 마음의 준비를 갖춘다. 세계가 당장 덜 망가져 보이진 않더라도, 고치는 법은 훨씬 선명해진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결론적으로, 이 책은 과학기술을 삶의 언어로 옮겨 주는 믿을 만한 통역사다. 논쟁의 열기를 식히고, 상상의 불씨를 살리고, 실천의 목록을 남긴다. 교실·회의실·동네 모임에서 함께 읽고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알찬 교양서다. 책은 독자에게 최소한의 공구 세트를 건네준다. 드라이버와 스패너를 어디에 쓸지 알려주고, 때로는 설명서를 접고 직접 조립해 보라고 등을 떠민다. 덤으로 만화책이라 착각했던 인상적인 표지 디자인은 오래도록 기억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