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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ooster님의 서재
  • 법은 어떻게 민주주의를 배신하는가
  • 신디 L. 스캐치
  • 17,550원 (10%970)
  • 2025-07-09
  • : 1,64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같은 교직에 있는 대학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선배, 요즘 너무 힘들어요. 주위 선생님들이 저를 대놓고 무시하고, 이제는 법적으로 대응해서라도 벗어나고 싶습니다.” 순간 멈칫했다. 대학 시절 그 친구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단 혼자 있는 걸 좋아하던 내성적인 학생이었다. 그런 그가 교사가 되어 나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다니. 평소 연락을 자주 하던 사이는 아니어서 잠깐 고민했지만, 결국 이렇게 말했다. “식사나 커피 한 잔이라도 같이하면서 진솔한 대화로 풀어보는 게 어때? 인간관계는 법보다 가까운 데서 작용하는 무언가가 있으니까.” 사실 나 자신도 확신이 있었던 건 아니다. 법이 분쟁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수단인 것은 분명하지만,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유일한 답은 아니지 않은가.

 

이 책의 저자도 이와 비슷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는 헌법학자로, 전쟁이나 내전으로 무너진 국가(예컨대 이라크)에서 어떻게 하면 헌법을 제대로 세워 나라를 재건할 수 있는지 연구해온 사람이다. 오랫동안 그는 법과 헌법이야말로 사회 협력과 평화를 지키는 핵심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믿음이 얼마나 일방적이고 부족한 생각이었는지 깨달은 뒤에 쓴 반성문처럼 읽힌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법이 있다고 해서 공동체가 저절로 협조적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협력의 문화가 먼저 있어야 법도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이라크의 사례를 보면 당연하게 들릴 수 있지만 그는 이 원리를 특정한 상황이 아닌 보편적인 원칙으로 확장한다.

 

“더 많은 법률을 통해 사회를 고치자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전 세계를 가로질러 개인과 개인을 연결하는 기술이 전례없이 발전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법과 규칙, 위계질서에 기반한 리더십이라는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민주주의가 작동하게 할 때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시민을 한 명, 한 명씩 바꿔보자는 거다.” (33쪽)

 

물론 그렇다고 법이 필요 없다는 건 아니다. 다만 법만으로는 사회 질서를 세울 수 없으며, 대신 공동체가 지켜야 할 여섯 가지 생활 원칙을 제시한다. 쉽게 말해 “우리 서로 조금 더 잘 지내자, 배려하자”는 이야기다. 얼핏 식상하고 순진하게 들릴 수 있지만 저자는 매우 진지하다. 과거 아리스토텔레스나 키케로가 강조한 공공선을 위한 시민의 미덕과 맞닿아 있다.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말이 있다. 미국의 법관 러니드 핸드 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의 화합이 깨지면 어떤 법정도 해결하지 못한다. 반대로 화합이 굳건하면 법정이 필요 없다. 모든 문제를 법정에 떠넘기면 결국 화합의 정신마저 사라진다.” 저자의 생각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말이다.

 

현실의 갈등 대부분은 시민과 국가 간의 대립보다, 시민 집단끼리의 이해 충돌에서 비롯된다. 예컨대 집값 안정 정책은 기존의 주택 소유자에게는 유리해도 무주택자에게는 불리하다. 노인 연금 확대는 젊은 세대의 세금 부담으로 이어진다. 기후변화 대응 정책은 미래 세대에게는 필요하지만, 현재 세대에겐 불편함을 안겨준다. 이런 문제를 모두 법으로 해결하려 들면 정치는 결국 집단 이익의 힘겨루기로 변질한다. 이를 벗어나려면 개인적 이익을 넘어 사회 전체의 행복과 공공선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과 파면 사례는 오히려 법이 민주주의의 장애물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줬다. 자칭 법 전문가이지만 시민성을 결여한 그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며 비상계엄 선포를 앞세워 국회와 정적을 압박하려 했고 그 결과 사회는 극도의 혼란을 겪어야 했다. 법적 형식이 앞세워지는 과정에서 신뢰와 협력은 오히려 사라지고 말았다. 법비들이 저지른 만행으로 법이 갈등을 해소하기는커녕 심화시킬 뿐이었다. 법적 절차는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도구이지만, 동시에 법체계 운용자가 법을 지키지 않거나 그 권한을 남용하면 정치권력의 정당성보다 법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방해물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대표적 사례로 남는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협력을 필요로 하고, 협력은 공유된 지식을 필요로 한다. 공유된 지식은 광장을 필요로 한다.” (151쪽)

 

저자는 법적 강제력에만 의존하면 공동체의 문제가 독재나 권위주의적 강압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한다. 그래서 법과 제도에만 기대지 않고 도덕적이고 자발적인 시민의 미덕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게 참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저자는 잘 알고 있다. 그가 제시하는 해결책이라는 것이 결국 ‘지도자를 맹신하지 말고, 책임 있게 권리를 행사하며, 이웃과 적극 소통하고, 스스로 자급자족하려 하고 환경을 신경 쓰며, 다른 집단과 공감하자’는 다소 추상적이고 도덕적인 권유 정도에 그치고 있다. 이런 조언들은 맞는 말이지만 실행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저자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공공선을 논의하는 ‘피아자(광장)’ 개념을 제시한다. 그러나 현대처럼 복잡하고 규모가 큰 사회에서 이게 얼마나 가능할까? 결국 그는 현실적으로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지적한 문제와 고민의 방향성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다.

 

저자는 놀이터에서 낯선 아이들이 힘을 합쳐 막힌 물펌프를 뚫는 모습을 보고 떠오른 아이디어에서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왜 어른들은 문제만 생기면 법부터 찾으려 하고, 아이들처럼 스스로 대화로 해결하려 하지 않는지 의문을 품었다. 그는 시민으로서 우리가 바꿔야 할 세 가지 태도를 강조한다. 첫째, 방관자를 죄 없는 존재로 보지 말고 어려움에 부닥친 이웃을 돕는 것을 도리로 삼아야 한다. 둘째, 관계망은 작을수록 건강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지역 공동체 중심의 소규모 네트워크를 유지해야 한다. 셋째, 정기적으로 사람들이 모여 이름을 알고 신뢰할 수 있는 ‘광장’ 같은 공간에 참여해야 한다. 성공적인 작은 공동체는 구성원 간의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위계보다 대화를 중시하며, 개인의 어려움을 함께 짊어지는 민주적인 조직이다. 또한 법에만 의존하지 않고, 법이 허용하더라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선택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 책이 독자들이 스스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지역 사회를 위해 실험하고 변화시켜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법이 평등으로 나아가는 길목에 놓인 장애물을 제거할 수는 있어도, 그 길에 필요한 참여와 협력을 유도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 역할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215쪽)

 

결론적으로 이 책은 완전한 해답을 주진 않지만, 우리가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완전할 수 없고, 그 불완전함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책장을 덮고 나니 앞서 후배 이야기가 떠올랐다. 법적으로 해결하겠다는 그의 말을 곱씹으면서, 관계의 회복은 법이 아니라 마음의 공간에서 시작된다는 메시지가 더 크게 와닿는다. 저자의 통찰은 결국 거창한 이론이 아니라, 우리가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따뜻한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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