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일단 이 책 제목이 원래는 영어다. 다들 잘 아시겠지만(?) ‘무지’를 뜻하는 ignorance 이 단어와 유사한 negliecne가 있는데, 일단 영어 전공자로서 본능적으로 단어의 낯을 가려보고 싶다. 동사형 ignore와 neglect는 둘 다 어떤 것을 무시하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그 뉘앙스와 사용 상황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우선, ignore는 무언가를 ‘고의적으로 무시하거나 눈치채고도 일부러 신경 쓰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주로 특정 정보나 상황을 의도적으로 다루지 않으려는 행위를 표현할 때 사용한다. 즉각적이고 의식적인 행동에 중점을 두며, 무언가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외면하는 경우에 사용된다. 학교에서 배워야 하는 내용임에도 귀찮고 힘들어서 공부를 외면하는 상황에 딱 어울린다. 의도가 포함되었기 때문에 무지는 죄악이라고 한다.
다음, neglect는 어떤 책임이나 의무, 또는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에 대해 장기적으로 소홀히 하거나 주의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즉, 지속적인 무관심이나 관리 부족을 나타내며 고의적일 수도 있고 무의식적일 수도 있다. 오랜 기간의 무관심에 중점을 두며 주의나 관심이 필요하지만 반복적으로 돌보지 않거나 책임을 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사용된다. ‘태만’이라는 단어에 좀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단어 공부는 이쯤 해두고, ‘무지’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공자님의 유명한 말씀을 살펴보자.
"지지위지지(知之爲知之), 부지위부지(不知爲不知), 시지야(是知也)"
"아는 것을 안다 말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말하는 것이 진정한 앎이다“ 『논어(論語)』의 「위정(爲政)」편
공자는 이 구절을 통해 참된 앎이란 겸허함과 진실성에서 비롯되며,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이 말은 단순히 지식을 많이 아는 것만이 중요하지 않고,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그것을 채우려는 태도가 진정한 지혜로 가는 길임을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무지에 대한 저자 피터 버크의 21세기적 정의는 어떠할까?
저자는 무지가 단순한 개인적 결핍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역사적으로 구성된 복합적 현상임을 주장한다. 단순한 '지식의 부재'가 아니며, 오히려 사회가 지식과 무지를 선택적으로 구성하고 관리하는 방식에 의해 특정한 형태의 무지가 형성된다고 말한다. 역사적 사례와 문화적 맥락을 통해 지식과 무지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며, 이러한 과정이 개인과 집단, 더 나아가 국가 간의 권력 관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한다.
”지배층의 무지는 그들이 자신의 특권을 의심하지 않게 하고, 피지배층의 무지는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해왔다. 그래서 드니 디드로가 말한 것처럼 권력자는 사람들이 무지와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갖은 방법을 동원한다.“ (28쪽)
저자의 핵심 주장 중 하나는 특정한 무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고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지식의 정치학'과 연관 지어 설명하며, 권력자가 정보 접근을 제한하고 특정 지식을 의도적으로 은폐함으로써 특정 집단이나 개인의 무지를 이용하는 사례를 제시한다. 이를 통해 무지가 권력관계를 지탱하고 강화하는 구실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중세 유럽에서 일반 대중의 교육 기회를 제한하여 성직자와 귀족 계층이 권력을 유지했던 것이나, 식민주의 시기 식민 지배 국가들이 피지배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억압하고 그들의 역사적 지식을 왜곡했던 사례 등을 통해 무지가 체계적으로 활용된 방식을 설명한다.
또한 저자는 무지가 단순히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상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장려되거나 심지어 강요될 수 있는 조건임을 지적한다. 그는 '선택적 무지'라는 개념을 통해 사람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을 받아들이고,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는 심리적·사회적 메커니즘을 설명한다. 이는 특히 현대 사회에서 가짜 뉴스나 음모론의 확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사람들이 자신이 믿고 싶은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현상, 즉 확증편향을 의미한다. 무지와 편견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이러한 편향적 인식이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키고 집단 간 불신을 조장하는 데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철학자 니콜라스 리처가 말했듯이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 인간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신뢰할 만한 지식이 없으면 소문만 무성해진다. 심지어 이러한 소문이 널리 퍼지고 자주 반복되면 미신으로 굳어지기도 한다. 이 같은 현상은 중세 이후 기독교가 이교도, 유대교, 이슬람교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실제로 일어났다.“ (86쪽)
저자는 또한 무지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에 대해서도 주목한다. 그는 지식의 양과 접근성, 전달 방식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면서 무지의 형태와 정도 역시 변모해 왔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인쇄 혁명 이후 지식의 전파가 가속화되면서 기존의 무지 형태가 급격히 줄어든 반면, 새로운 종류의 무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현대에 들어서는 정보 과부하 현상과 잘못된 정보의 확산으로 인해 새로운 형태의 무지가 생겨나고 있으며, 이는 무지가 단순히 무언가를 '모르는 것'에서 벗어나 의도적으로 '잘못된 것을 아는 것'으로 변질되었음을 보여준다.
저자의 중요한 또 다른 개념은 '무지의 윤리'이다. 그는 일부 상황에서 무지가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모든 무지가 반드시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아님을 설명한다. 예를 들어, 과학 기술의 발전 과정에서 윤리적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것이 오히려 해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무지는 때로는 윤리적 딜레마를 피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으며, 인간의 한계와 도덕적 경계를 지키기 위해 일정 수준의 무지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저자의 주장은 단순한 정보와 지식의 문제를 넘어서, 무지를 키워드로 하여 인간 사회와 역사에 미치는 영향을 폭넓게 분석해 본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무지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조작되어 왔으며 특정한 사회적·정치적 목적에 따라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그 역사를 배우고, 이를 통해 무지가 역사적 사건들과 권력 구조에 끼친 영향을 입체적으로 조명해 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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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