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에 관해 알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했었다. 하지만 마땅한 입문서를 찾기가 어려워 이런 저런 책을 뒤적이다가 내려놓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던 차에 발견한 책이다. 기독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에 대해 전반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청소년 눈높이에 맞춰 씌어졌기 때문에 입문서로 적당하다.
어떤 장르의 입문서를 구할 때면 늘, ‘청소년’을 독자대상으로 삼는 책들을 고른다. 청소년 눈높이에 맞추어 씌어졌기 때문에 내용이 어렵지 않고, 가독성이 좋은 책들이 많다. 만화로 된 도서 역시 입문자들에게 추천할만하다. <주니어 김영사>에서 나온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50선> 시리즈가 바로 그렇다. 그렇게 고른 책 치고 실패한 적이 거의 없다. 이 책 역시 그중의 한권이다.
종교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다. 그것이 종교의 속성이다. 특히나 유일신을 믿는 종교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 보수성은 때론 자유를 허용치 않는다는 점에서 폭력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이슬람교가 그렇다. 이슬람은 ‘평화’와 ‘신에 대한 복종’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알라의 뜻에 ‘복종’하여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는 뜻이다. 알라에게 절대 복종하는 것은 이슬람교의 처음이자 마지막과도 같다. 그리고 이슬람교는 여성에게 아주 엄격하고 까다로운 관례를 제시한다. 베일이나 일부다처제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코란의 법경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모든 이슬람국가에게 적용되는 사항은 아니고, 일부 극단적인 이슬람국가(이슬람 무장세력, 사우디아라비아)에게 해당 된다. 무슬림 여성들이 베일을 쓰는 이유는 남편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 피부나 얼굴을 보여선 안 된다는 계율이다. 이것은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사실을 전제하는 계율이다. 여성의 인권을 위협하는 계율이며, 성 차별적이다. 폭력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종교라는 이름을 쓰고 자행되는 폭력들은 이슬람 외에도 많을 것이다.
두 번째로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은 불교에 관한 부분이었다. 불교에서는 신을 믿지 않는다. 불교는 신앙 중심이 아닌 수행 중심의 종교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타 종교에 비해 관용적이며, 포용적이다. 배타성이 강한 유일신 종교(기독교, 이슬람교 등)들과는 다르다.
불교는 아시아의 종교다. 인도에서 시작해 중국을 통해 아시아에 전래 되었다. 서양인들이 위와 같은 불교의 매력을 좇는 경우도 있다. 신앙 중심인 기독교는 신자들에게 믿을 것을 말한다. 하지만 불교는 수행 중심의 종교이기 때문에 믿음을 설파하지 않는다. 바로 그런 점이 사람들에게 편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부처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고 몸과 마음의 집착을 끊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소유란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고집멸도’라는 말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부처의 가르침은 앞서 읽은 데이비드 호킨슨의 ‘놓아버림’과도 같은 맥락이다. 자신을 놓아버릴 것. 자신을 끊임없이 놓아버릴 것. 그러나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끝없는 내적수련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나’라고 부르는 것이 실제로 ‘나’일까요? 여러분은 몸이나 느낌, 지각, 의식, 의지 따위를 통해 내가 있다고 느낄지도 모르죠.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부처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은 것이 이것이에요. … 그렇다면 정말 ‘나’는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나’는 환상 아닐까요? 어쩌면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내 마음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 구절은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코기토(Cogito)’와도 같다. 코기토는 근대의 프랑스 사상가인 데카르트에 의해 나온 말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바로 그의 명제이다. ‘나’라는 개념은 생각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 또한 이것은 실존주의 철학과도 맞물려 있다.
불교는 타 종교와는 다르게 철학과도 접목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또한 그것이 불교의 매력(?)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