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4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다. 상대 차량의 100퍼센트 과실이었다. 다행히도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큰 사고였던 지라 이후의 충격과 트라우마가 컸고, 개인사도 엮여있던 일이라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무력감과 우울에 젖어 하루하루를 연명하듯 살던 때, 그 시기에 우연히 오은 시인의 칼럼을 읽게 되었다. 한겨레 신문에 기고한 칼럼이었고, 칼럼의 제목은 아마도 '숨구멍'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인이 교통사고를 당하고 그 이후에 겪은 일들을 적은 글이었다. 당시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있던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동질감과 동시에 마음 한구석이 저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운한 사람이 된 심정이었는데, 글 속에서 시인은 나보다 더한 사고를 겪고도 '살아남아' 특유의 밝음과 씩씩함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고통의 경중을 재는 일이 무슨 의미겠냐마는, 글을 읽으면서 나는 시인이 그러한 큰일을 겪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고, 한편으론 특유의 밝음이 부럽기까지 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어떻게 그런 일을 겪고도 후유증이 남아 힘드셨을 텐데, 그처럼 명랑하고 천진한 시를 쓰지? 어떻게 그렇지?' 하고 나는 신기해했다. 읽다 말고 어느 대목에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 글은 내게 작은 위로가 되었다. 시인의 개인사를 엿보았기 때문일까, 이후로 나는 '시인 오은' 보다는 '한 사람으로서의 오은' 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로 그가 쓰는 칼럼을 구독하며 몇 번 더 엿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 오은 시인의 산문집이 출간되었을 때, 반가운 마음이었다. 『다독임』은 2014년부터 2020년까지 발표한 글들을 모은 책이다. 글들을 각 연도별로 묶어 분류했다. 전체적으로 가볍고 매끄럽게 읽히고, 전철을 타고 오가며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책 제목인 '다독임'과 책에 실린 글들이 썩 잘 어울린다. 다독임, 누군가의 마음과 등을 천천히 다독거려 주는 손길. '다독임'이란 단어의 사전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다.
다독임: 1. 흩어지기 쉬운 물건을 모아 가볍게 두드려 누르다. 2. 아기를 재우거나 달래거나 귀여워할 때 몸을 가만가만 두드리다. 3. 남의 약한 점을 따뜻이 어루만져 감싸고 달래다.
이중에서도 3번 의미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남의 '약한' 점을 따뜻이 어루만져 감싸고 달래는 손길. 그런 손길이 어느 글에서도 느껴진다.
아빠에 대해 알 것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사실 또한 나를 슬프게 했다. 긴 시간을 함께해도 몰랐던 것들이, 상대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보이기 시작한다. (중략) 아빠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이 온기를 절대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아무리 준비해도 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마음일 것이다. 물질적 준비는 차곡차곡 모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신적 준비는 상상을 요하는 것이다. 소중한 대상이 떠나고 난 다음 장면은 쉽사리 그려지지 않는다. 그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몸에서 어떤 것이 스르르 빠져나가고 만다.
- 『다독임』, 「사랑한다, 라고 말할 시간이 온 것이다」, p.212
글 속에서 시인의 마음은 넘치지 않게 담겨있다. 그것이 감정의 부족이나 결여가 아닌, 어떤 '절제'를 바탕으로 씌어진 글이기 때문이다. 활어처럼 날뛰는 감정이 어느 순간 차분히 정제되고 절제되기까지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걸까. 오래 묵혀둔 슬픔에 대해 얘기할 때 담담한 어조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담담함이 되레 듣는 이의 마음을 툭, 건드리기도 한다. 몇 해 전, 내가 그의 칼럼을 읽으면서 위로 받았던 순간들처럼 말이다. 산문집을 읽는 내내 마음 한구석에 따뜻한 햇볕 한 줄기가 조용히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아마도 누군가 조용히 다독거려 줄 때의 느낌도 이와 닮아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