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로부터 도서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1592년 임진년 4월 13일 왜군은 부산포에 상륙하였고, 조선 땅을 유린하기 시작하였다. 경남 부산폴르 지나 서울 한양으로 진격하였으며, 조선 전역에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었으며, 왜군의 압도적인 힘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그 와중에, 육지와 달리 해전은 이순신이 이끌던 거북선과 판옥선을 이용하여, 왜군이 조선을 장악하지 못하는데 최선을 다하였고, 세계해전사에서 굵직굵직한 기록을 만들어갔다.통상적으로 23전 23승을 거두었던 이순신장군은 1598년 11월 18일~11월 19일 일본군에 의해 서거하였다.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와, 류성룡이 쓴 징비록을 읽어보았다. 두 책은 조신의 전란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으며, 역사 유튜버들이 임진왜란을 다룰 때, 필독서이기도 하다. 류성룡의 징비록은 조선보다 일본에 널리 읽혀졌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순신은 영웅이지만, 원균은 역적으로 남았다.아직은 임진왜란에 대해 연구해야 할 요소가 여전히 존재한다. 역사는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닌, 시대적인 해석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1597년 2월 파직되었고,투옥된다. 삼도수군통제사느 이순신이 아닌 원균이 된다. 선조 임금은 이순신 대신 원균을 신뢰하였고, 인진왜란 중에 ,원균이 조선 해군을 통솔하였다. 원균은 왜군의 수급을 확보하기 위해서,혈안이 되었고,노비에게 왜군의 수급을 가져온다면, 노비로서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원균은 1597년 8월 27일 칠천량 해협에서 일본군에 의해 크게 패배하고 말았다. 곧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은 29척의 배를 이용하여,일본에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선조는 이순신이 필요했지만,그를 두려워 했다. 이순신의 모습에서,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것을 기억했던 것이다.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이순신을 임진왜란의 공훈에서 배제하였던 이유였고,이순신을 천거했던 재상 류성룡도 마찬가지였다. 왜군의 수급을 수거했던 원균의 군사전략 뿐만 아니라 일본군이 조선의 귀와 코를 잘랐던 것을 볼 때, 7년간의 임진왜란이 어느 정도로 처참하였는지 눈여겨 볼 수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은 일본군의 1차 침입이었다면, 1597년 정유재란은 일본군의 2차 침입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