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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도리님의 서재


어머니는 동생이 그날 신고 나간 고동색 양말을 알아본 것이었다. 과연 광목을 들치니 중학교 2학년인 앳된 남학생의 시체가 피로 범벅된 교복을 그대로 입은 채 드러났다. 총알은 턱 밑에서 오른 쪽 귀바퀴 쪽으로 관통해 나간 모양이었다. 빨리 손을 썼으면 살릴 수도 있었을 텐데 그 난리통에 이리저리 실려 다니다 죽고 말았음에 틀림없었다. 어머니는 동생의 시체를 부둥켜 안고 몸부림치며 통곡했다. (-20-)



그리고 미결감에서도 그랬지만 사람들은 감방 안에서 할 수 있는 놀이를 창안해내어 즐기며 희희낙락하기도 하였다. 연필 몽당이 같은 것을 가지고 윷을 만들어 놓기도 하고 고누를 두기도 하였다.시찰구에 거울 조각을 비스듬히 대고 갭(담당간수)이 오나 안 오나 망을 보는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모든 놀이꾼들이 놀이에 열중하였는데 그 순간만은 그들이 감방에 있다는 사실조차도 잊은 듯 하였다. (-37-)



드디어 법정 출정 날이 왔다. 사방의 사람들은 아침식사 때, 재판 운수가 따르라고 덕담을 해주면서 나에게 밥과 반찬을 맨 먼저 건네 주었다. 담당의 출정고지에 따라 나는 복도로 나갔다. 복도에는 이미 출정고지를 받은 십여 명의 미결수들이 나와 있었다. 담당이 중범자들을 따로 분리하여 수갑을 채우고 포승줄로 묶었다. (-65-)



내가 양자로 들어가 있던 큰아버지 집이 이전에 왕십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곳 지리가 익어서 그랬을지도 볼랐다. 과부댁 딸도 큰아버지 집에 기거했던 적이 있었으므로 왕십리에 대해 생소하게 느끼지 않는지 나를 따라오는 것을 그렇게 꺼려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어디 사람들의 왕래가 드문 곳으로 가서 나에게 실컷 욕을 해대고 싶었을 것이다. (-99-)



새로운 수인 번호를 받은 나는 이전의 교도소에서처럼 인쇄 공장에 지정되어 주조반에서 주조기를 다르게 되었다. 그 공장에서 일하는 기결수는 70여 명 되었는데 <모스크바> 라는 교도소 별명에 걸맞게 좌익수가 20여 명이나 되었다.

좌익수들은 6.25 때 부역한 죄로 장기형을 받아 지금껏 복역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거기서 나는 교도소에서도 6.25 라는 망령이 여전히 웅크리고 있음을 섬뜩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바깥 사회에서 이따금 출몰하는 6.25 의 망령들은 바로 이 교도소에서 잠깐 외출을 나간 망령들인지도 몰랐다. (-139-)



나는 간병에게 내 머리맡에 놓인 성경을 펴서 이사야 38장을 읽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서 이사야 1부분을 찾는데 좀 시간이 거린 간병인이 떠듬떠듬 그 부분을 일기 시작했다.드디어 히스기야의 기도가 내 귓전에 울려왔다. 그것은 그야말로, 벽을 향하여 돌아 누운 내 영혼의 기도였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중년에 음부의 문에 들어가고 여년을 빼앗기게 되리라 하였도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리니 생존 세계에서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168-)



긴급조치법에 걸린 많은 반체재 인사들은 주로 인쇄공장에서 복역하게 되었다. 기독교 지도자로 반체재 운동에 앞장섰던 목사 한 분은 인쇄 공장 상층 문선반에 지정되어 자기가 그토록 싫어하던 정책의 선전 책자를 위해 활자들을 뽑아 주고 있었다. 그분은 작업에 익숙지 못하고 건강도 나빠서 작업성적이 좋지 않았지만 나는 총반장의 권한으로 그분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해 주곤 하였다. (-202-)



1979년 5월 3일이었다. 감옥에 들어온지 꼭 18년 18일이 되는 날이었다. 나는 18년 전 봄으로부터 무자비하게 추방되었다가 이제 다시 봄의 품 안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225-)



소설 『가시둥지』의 시대적 배경은 1987년 5·18민주화운동, 1960년 에 일어난 4.19 혁명, 1979년10월 26일에 일어난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이 세가지 역사적 배경을 담고 있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와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시체로 발견된 과부댁 딸로 인해 수인번호 4584가 되어야 했던 비극의 주인공 4584의 20년의 가시둥지의 삶을 들추고 있었다.



책 제목 '가시둥지'는,독수리의 둥지였으며, 생존과 진화 와 연결된다. 독수리는 자신의 새끼가 스스로 살아나도록 하기 위해서, 동지에 가시로 덮어 버린다. 독수리 스스로 높은 창공을 향해 하늘을 날 수 있어야 살 수 있다는 날짐승의 비정한 생존을 의미한다.날지 못하면 죽음을 의미하며, 스스로 날아 사는 법을 익혀야 했다. 극한 고통 속에서, 살아남았을 때, 강해지는 법을 터득하게 되고,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대해 감사함을 느낀다.안온한 삶을 살아온 이들이 결코 주어진 삶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미결수, 수인번호4584는 바깥과 영원히 단절된 삶을 살아야 한다. 기약없는 삶,무기수로서 살아야 하는 인생을 위로하는 건, 자신을 찾아오는 김양과 성경책과 찬송가 뿐이었다. 수인번호로 불리어진 4584는 좁은 공간 안에서, 스스로 노는 법능 터득하였으며,사회성은 제로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교도소 안에서, 영등포 교도소와 대전 교도소를 오가면서, 인쇄공으로서, 문선공으로 일했던 것은 인생의 의미를 시간이 아닌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서 찾게 된다.



여죄수와 남죄수가 서로 층을 달리하여 공간배치가 되었으며, 남죄수는 2층의 여죄수가 있는 곳을 우러러 보는 방법 밖에 없었다. 면회도 순서가 있었고,바깥 세상을 보는 것은 사치였다. 하지만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 하였던가,인쇄공으로로서 착실하게 살아온 그는 18년간의 교도소생활을 미치게 되고, 대통령 취임 특별사면으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교도소 안의 느리고 따분한 시간과 교도소 밖의 시간은 20년간의 시간 차이를 극복하기 힘들었다. 사과하나를 20조각으로 나누어서 먹어야 했던 교도소 생활에 갇혀 있었던 그 시간은,버스를 타면서도,시내 버스비를 제대로 계산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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