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 선생님께서 교수 신문에 [지각의 현상학]을 소개하는 글을 올리셨다. 주성호 선생님의 번역어에 대한 세심한 설명은 메를로 퐁티철학을 한국말과 세계관으로도 얼마든지 적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는 듯 하다. 자료참고(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4910 )
"우리말로 새로 태어난 [지각의 현상학]
[지각의 현상학]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현대철학의 고전이다. 나는 유명한 이 책 자체보다는, 내가 번역한 한글본 [지각의 현상학]이 어떤 책인지를 소개하고 싶다. 특히 원전의 주요 용어들을 우리말로 어떻게 옮겼는지를 설명하면서 내 번역서가 갖는 특징을 드러내고 싶다. 예를 들어 기존에 쓰이던 번역어들과 다른, <몸corps>, <관점적 현상perspective>, <실질의미/의미signification>, <부추김motivation>이라는 번역어를 통해 한글본 [지각의 현상학]이 어떻게 메를로퐁티의 철학을 드러내는지를 보여주고 싶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 책의 내용에 대해 궁금해하는 독자들은 [지각의 현상학]이 어떤 책인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각의 현상학]에서 제일 중요한 용어는 <corps(=body)>일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자신의 철학적 입장에서 이 용어를 데카르트나 유물론자와는 다른 의미로 쓴다. 그것은 주체 자신이 <체험한 corps(body)>이다. 이 용어는 종종 <신체>로 옮겨지지만, 나는 <몸>으로 옮겼다. 그것은 우리말 <몸>이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체험된 <자기 몸corps propre>을 잘 나타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몸이 아프다>고 말하지, <신체가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찬 바람 부는 겨울에 <몸이 춥다>고 말하지, <신체가 춥다>고 말하지 않으며, 잠을 잘 잔 후에 <몸이 가뿐하다>고 말하지, <신체가 가뿐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객관적인 몸무게가 어제와 똑같이 60kg이지만, 오늘 체험한 몸 상태에 따라 우리는 <몸이 가볍다>, <몸이 무겁다>라고 말한다. 기존의 번역어 <신체>는 <해부학적 신체 구조의 고찰>이라는 표현처럼, 데카르트나 유물론자가 말하는 3인칭적인 객관적인 몸을 가리키기에는 적합하지만,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체험된 <자기 몸>을 가리키기에는 어색하다.
메를로퐁티는 이런 자기 몸을 “세계에 있는(세계로의) 존재의 수레”, “세계에 대한 내 관점”이라 규정한다. 여기서 “세계에 있는(세계로의) 존재”는 인간을 (또는 생명체를) 가리키고, 이때 몸은 인간이 세계에 있으면서 세계로 향하게 하는 일정한 관점을 의미한다. 우리말 <몸담다>는 바로 몸(관점)을 통해 우리가 세계에 있으면서 그런 세계로 향해 있음을 잘 보여준다. <김 선생님은 교육계에 오랫동안 ‘몸담고’ 있어, 사람들 만날 때마다 훈계하듯 말한다>고 할 때, 그는 몸담은(관점적) 세계(교육계)에 있고, 그러한 자신의 <몸-관점>을 통해 그러한 세계를 지각하고 행동한다. 이러한 세계에 몸담은 주체의 <관점>은 [지각의 현상학]에서 세계와 관계하는 몸의 가장 일반적 규정이다. 그러나 <신체>라는 용어는 세계에 있는(몸담은) 관점적 주체와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가 몸을 통해 세계를 관점적으로 본다면, 세계는 우리의 관점(몸)과 맞물려 나타날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세계의 이런 나타남을 <perspective>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이 용어는 종종 <조망>으로 옮겨지지만, 나는 <관점적 현상>으로 옮겼다. <perspective>는 주로 공간적인 <원근법적 현상>을 뜻하지만, [지각의 현상학]에서 그것은 공간적인 현상만 아니라 문화적, 도덕적, 시간적 등 세계가 나타나는 관점적 모습 일체를 의미한다. <조망>이란 용어는 세계의 공간적인 현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제한되기 쉽고, 더욱이나 관점적인 주체와 맞물린 세계의 모습, 즉 관점적 현상을 드러내지 못한다. 앞서 본 김 선생님은 자신의 관점에 나타난 세계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려고 하지만, 학생들은 김 선생님이 가르치려는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김 선생님과 학생들은 각자의 몸(관점)으로 세계를 보고, 그들에게서 세계는 서로 다른 관점적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메를로퐁티 입장에서 나에게서의 대상의 의미와 타인에게서의 대상의 의미도 달리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순수 정신이 아니라 몸적인 존재이고, 우리가 파악한 대상의 의미도 순수 정신이 파악한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순수 정신(지성)으로 대상의 동일한 의미, 즉 순수 의미를 직관할 수 있다는 지성론의 입장과 대립한다. 그런데 메를로퐁티는 자신이 말하는 <의미>와 지성론에서의 <의미>를 모두 <signification>으로 표기한다. 이 때문에 이 용어는 두 경우 모두 <의미>로 옮겨져 왔다. 그러나 나는 메를로퐁티의 경우는 <실질의미>로, 지성론의 경우는 <의미signification>로 옮겨 구별하였다. 전자의 경우를 <실질의미>로 옮긴 것은, 우리가 파악한 대상의 의미는 순수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 구체적 질료나 물질이 있기 때문이다. 로큰롤의 의미가 로큰롤의 소리와 떨어질 수 없듯이, 우리에게서 대상의 의미는 그 질료나 물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메를로퐁티에게서 이처럼 순수 의미가 없다면, 순수 질료나 순수 물질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메를로퐁티가 생각하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지성론(또는 관념론)이나 유물론이 주장하는 것과 다름을 함축한다. 지성론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지향성의 관계로, 즉 주체가 대상에 의미 부여하는 일방향적 관계로 파악하고, 유물론은 대상에서 주체로 향하는 일방향적 인과관계로 파악한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1인칭적인 지향성과 3인칭적인 인과성으로 나눠지기 이전에, 주체와 대상의 순환적 관계 또는 그것들의 맞물린 관계로 파악한다. 그리고 <motif>와 <motivation> 현상을 이러한 관계의 예로 제시한다. 이 용어들은 대개 <동기>와 <동기부여/동기화> 옮겨지지만, 나는 <부추기는 것>과 <부추김>으로 옮겼다. 왜냐하면 우리말 <동기>는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현상 중, 비인과적이지만 주체의 의지적(지향적) 개입이 약한 주객관계를 나타낼 때 어색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디어가 사람들의 혼란을 ‘부추겼다’>고 말하지, <... ‘동기 부여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게다가 메를로퐁티는 <motivation>을 지각된 사물과 사물(또는 그 사물의 조건)의 관계에서도 쓰는데, <동기부여>는 이런 관계를 전혀 드러내지 못한다. 예컨대 지펑선의 보름달이 중천의 보름달보다 크게 나타나는 착시 현상을, 메를로퐁티는 <지평선의 여러 조건(배경)이 지평선의 보름달이 크게 나타나도록 ‘부추겼다’>고 말하는데, 이것을 <... 보름달이 크게 나타나도록 ‘동기 부여했다’>고 말하면 무척 어색하다.
이처럼 나는 [지각의 현상학]의 용어들을 메를로퐁티의 철학적 맥락에 맞춰 우리말로 정확히 표현하려고 했다. 이 외에도 지면 관계상 소개할 수 없지만, 여러 다른 용어들, 메를로퐁티가 쓰는 관사, 비유적 표현 등을 그의 철학적 맥락에서 맞춰 정확히 번역하려고 노력했다. (교수신문, 1926.01.26.)"
이 책을 읽는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 전문을 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