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잘 우는 편이다. 물론 나 자신 때문에 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름다운 사람을 볼 때, 우리의 아름다운 역사와 문화를 볼 때, 나는 그들을 위해 운다. 때로는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천만 번, 억 번 우는 것도 아깝지 않은 경우가 있다. 사랑하는 가족의 경우가 그러하고, 아름다운 역사와 문화를 가꾸어왔던 선비들의 경우가 그러하고, 세상을 위해 헌신한 학자들의 경우가 또한 그러하다. 그 가운데 한 사람. 바로 故 오주석 선생이다.
그만큼 우리 그림을 제대로 본 이가 있었을까? 그림 한 장에 담긴 그 무수한 의미들, 그것이 주는 세상에 대한 깊은 마음. 미처 읽지 못했던 것들을 그는 읽어냈다. 선비의 마음은 선비가 안다고 했던가? 어쩌면 그 자신이 참 선비여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선생이 고인이 된 지도 벌써 3년이 넘어간다. 오랜만에 만나는 선생의 반가운 유고집이다. 오래 전부터 내고 싶어하던 수필집이란다. 그렇다. 예술은 우리의 눈만으로는 담아낼 수 없다. 뜨거운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죽은 것이다. 그런데 차가운 이성을 담보로 하는 논문이나 학술서는 그것을 담아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물론 뜨거운 마음을 담은, 그래서 뜨거운 감동을 안겨주는 논문, 학술서가 무수히 많기는 하지만. 아무튼 선생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던지 따로 수필집을 내고 싶어했는데 불행히도 그가 세상을 등진 후에야 나왔다.
선생은 진실했다. 정직했다. 의리가 있었다. 바로 선비였다. 그렇기에 거짓과 헛된 욕망을 준엄하게 꾸짖을 수가 있었다. 시중에서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글들을 정말 흔하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담보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남을, 세상을 가차없이 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끝간데없는 왜곡과 조작의 덮개를 씌우고 있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이 그렇고, 우리의 국수주의가 그렇다. 그것은 거짓 사랑이다. 거짓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우리의 주위에는 거짓 사랑이 넘쳐난다.
어디 그뿐인가? 사회 전반을 보면, 겉만 번지르르하지 속은 텅 빈 경우가 적지 않다. 남을 위해 기꺼이 발자국 역할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모두 뒤만 졸졸 따라간다. 교양과 천박함의 진정한 의미도 모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리듬앤 블루스풍의 노래를 부르면 고급스럽고, 트로트를 부르면 저급스러운가? 그것은 도대체 누가 만든 규정인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신을 포장하기에, 내면의 참된 아름다움을 숨기기에 바쁘다. 선생은 그런 세상, 그런 사람들을 향해 일갈한다. 이 책을 보며 내 얼굴에 침을 뱉는 듯한 쓰라림과 끝모를 부끄러움을 가슴 깊이 느꼈다.
이 책을 보면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바로 아름답게 살다간 이를 추도하는, 아름답게 살고 있는 이들의 추도사이다. 아마 추도사가 책의 4분의 1 정도를 차지하는 것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그만큼 그를 잃은 것이 우리에게는 큰 손실이었음을 보여준다. 과연 그와 같은 진정한 학자를 우리는 만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아니, 나는 반드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는다. 역사는 더디지만 언제나 우리에게 그런 믿음을 주었고, 그것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관해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부끄럽지만 국사 교과서에서 배운 것이 전부인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그 국사 교과서조차 식민주의사관의 뿌리 깊은 악습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면? 하기야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헌신짝처럼 대하는 시대에 그나마 배울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하게 여겨야 할까? 조선총독부 건물을 한 나라의 중심 박물관으로 사용했어야 할 만큼 우리의 역사의식, 문화의식은 천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것 또한 서양 것이 지나치게 좋다 보니 우리 것이 그만큼 못해 버렸다는 것으로 합리화해도 될까?
아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늦었더라도 이제부터 고쳐나가야 한다. 물론 우리 것만이 최고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 것이 지녔던 제 위치는 찾아주어야 한다. 그것이 이 땅을, 그리고 이 땅의 역사와 문화를 아름답게 가꾸어 온 선조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의리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을 제대로 안다면 선생이 하늘에서라도 기뻐하며 춤을 추지 않을까?
생전에 이 독화수필을 내고 싶어했다고 들었다. 그 심정을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그는 필경 논문보다 이러한 수필에 더 애정이 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섬세한 마음이 이처럼 처절할줄이야. 그가 깨달은 것을 다른 사람들도 인정하여 함께 기뻐하고 싶었으나 세상은 냉담하였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거짓은 사라지고 참된 것은 남는 법이다. 시간이 걸릴 뿐이다. 이른바 교양인들은 모두 알고 있으니 너무 애탈 필요가 없다.
작품을 읽는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작품이 전하는 사실을 읽는 것은 처음 단계요, 작품이 전하는 아름다움(미술양식)을 파악하는 것은 그 다음이요, 작품이 전하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 종착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단계에도 제대로 이르는 사람이 드물다. 그러나 그 세 가지를 다 읽었기에 죽음을 앞두고 첫 수필집을 생전에 내려고 했을 것이다. 하늘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편히 잠들기를. (오주석,『그림 속에 노닐다』, 솔, 2008, 5쪽 간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