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대왕 세종」이 조선 초기의 역사를 너무 왜곡해서 소개하고 있는 탓에 많은 논란이 있는 것으로 안다. 어차피 극이라는 한계가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나는 이런 논란에 끼어들어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사극은 극일 뿐이며, 올바른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될 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아무튼 드라마의 영향이란 무서운가보다. 드라마「이산」의 방영으로 서점가에 정조대왕 열풍이 거세게 일더만 이번에는 세종대왕이다. 세종대왕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랍시고 우후죽순처럼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 모두가 제대로 된 책들인지에 대한 나의 시각은 지극히 회의적이다. 그런 가운데 나에게 온 한 권의 책이 바로 이것이다.
꽤나 독특한 시각으로 세종의 시대를 풀어가고 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세종 시대의 인물과 찬란한 문화도 물론 적지 않게 다루고 있지만, 세종 시대가 만들어지게 된 배경을 강조한다든지 세종 시대의 빛과 그림자를 균형 있게 서술하려 노력했다는 점은 무척 인상적이다. 저자의 말처럼 빛이 강하게 내려쬘수록 그 그림자도 짙어지는 법이다. 아무리 태평성대라도 신분제라는 것이 인간을 옥죄고 있는 이상 한계란 없을 수 없으며, 너무나 찬란했기에 뒷 시대에 벌어지는 그 참담한 일들이 더욱 가슴 쓰라리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의 감상만으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역사가 아닌가. 그러기에 역사를 바라볼 때 따뜻한 감성과 냉철한 이성이 균형을 갖추어야 함이 지극히 당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록을 비롯한 각종 사료라든지 여러 저서와 논문을 참고하여 세종 시대의 사람들을 치밀하게 다루고 있다. 때로는 무릎을 칠 만큼 탁견이라고 생각되는 것도 적지 않다. 특히 세종 시대가 탄생되는 배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서술은 매우 깊은 공감을 가지게 할 만큼. 세종의 백년지계를 커다란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저자의 외침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게 한다.
그러나 빛이 강한 만큼 그림자도 짙다고 했는가. 그런 실수를 저자도 범하고 있을 줄이야. 탁견이 많은 만큼 오류도 적지 않게 보인다. 몇 가지만 이야기하면 이렇다.
우선 세종이라는 인물에 대한 묘사다. 세종 역시 한 사람의 왕이기 이전에 아들, 아버지의 역할을 한 인간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점에 지나치게 매몰되면 세종의 참 모습을 바라보는 데 장애가 된다. 나는 그 점에서 세종이 쉴새없이 공부를 하는 그 모습에서 ‘인정을 받고 싶어서’를 그 하나의 이유로 끌어온 저자의 견해가 쉬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세종이 즉위한 이후 32년 동안에도 병까지 앓아가며 일 중독, 공부 중독에 빠진 것을 설명하는 데 장애가 된다. 이는 인정을 받고 싶어서라기보다는 공부를 좋아했고 거기에 엄청난 노력파였다는 것이 결국 천성에 가까운 것임을 드러내준다.
특히 ‘선량한 독재자’라는 표현 자체를 동의하기가 힘들다. 저자는 딱히 그렇게 부를 만한 것이 없다고 했지만 그 말고도 부를 수 있는 용어는 많다. 물론『세종실록』을 보면 세종은 대단한 고집과 집념을 가지고 있었던, 강인한 면을 지니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일례로 양녕대군에 관한 수백 여 건의 상소를 모두 물리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고집과 집념은 독재와 다르다. ‘독재’라는 것은 모든 일을 혼자 처결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져올 파장을 별로 고려하지 않는다. 세종이 독재자라면 이 책의 저자가 그렇게 강조하는 세종 시대의 인물들을 다루는 것이 모순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세종은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강조한 왕이었다. 의정부 서사제는 그 중요한 증좌이다. 이 하나만 봐도 ‘독재’라는 용어를 쓰는 데 얼마나 신중해야 되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세종 시대의 외교를 낙제점으로 봤는데, 그렇다면 조선의 표준을 만들려고 했던 그런 유산들에 대한 설명과도 배치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낙제 외교를 한 사람들이 어떻게『칠정산』을 만들고『훈민정음』을 만들고『오례』를 만들었겠는가? 이는 조선이 중국과 거의 대등한 또 하나의 ‘중화’이며, 중국과 분명히 다른 나라임을 천명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유산들이다. 중국보다 더 나은 ‘중화’를 만들어 조선의 만년대계를 이끌었다는 세종과 그 시대 사람들의 원대한 이상을 본다면 세종 시대의 외교를 겉면으로만 파악해서는 곤란하며, 사대주의라는 용어도 좀 더 신중과 정확을 기해 써야 할 것이다.
가장 아쉬운 것은 세종 이후의 시대에 대한 저자의 시각이다. 세종의 시대는 표준이었다. 이것이 조선 500년의 기반이 되었음을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후의 발전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서술이 자주 보이는데, 이는 조선 후기의 역사를 제대로 살펴보지 않는 심각한 오류이다. 조선의 무서운 기록유산인『승정원일기』,『의궤』등만 보아도, 18세기 영, 정조 시대의 역사와 문화만 봐도 이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승정원일기』에는 280여 년간의 날씨 기록이 하루도 빠짐없이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지는 더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 단적인 오류의 예가 영조의 질문에 대답하는 신하들의 대답을 한심하다고 이야기한 대목이다(95~96쪽). 이것은 영조가 어떤 왕인지를 안다면, 이 시대의 정치 판도가 어떻게 돌아갔는지를 안다면, 이 신하들의 대답은 한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답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영조는 잘 아시다시피 탕평정치를 펼친 왕이다. 그러기 위해 들고 나온 것이 왕권의 강화와 안정이었으며, 그 모델을 요순에서 찾았다. 그런데 그 요순에 버금가는 칭송을 받는 왕이 바로 세종이었다. 이미 당대에 ‘해동의 요순’으로 불릴 만큼. 선조 때 훌륭한 인재가 나와 이른바 ‘목릉성세’를 이룬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세종 때와 비교해서 못하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영조의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발언이다. 신하들은 그런 영조의 마음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니 이것이 어찌 한심한 답이겠는가? 우리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그렇게 만만히 보아서는 안 된다.
물론 이런 오류에 대한 지적이 너무 지엽적인 것이기에 여기에 지나치게 마음을 쓸 필요는 없다. 더구나 이 책이 지니는 가치는 적지 않다. 무엇보다 엄정한 사료 비판과 철저한 탐구 정신이 가미되어 인물들에 대한 냉철한 묘사와 비판을 가하고 있는 부분은 이 책의 큰 장점이다. 그러다보니 수많은 견해에 큰 공감이 갔던 것도 사실이다.
오류라는 것이야 시간이 지나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번 비뚤어진 사람의 시각과 생각은 쉬이 고쳐지기 힘든 것이다. 더구나 사료 비판과 탐구 정신은 모름지기 역사를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그리고 역사서를 낸다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기본이다. 무엇보다 세종을 ‘조선의 표준을 세운 왕’임을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서게 해주었다. 이 두 가지는 이 책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