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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님의 서재

나는 약 3년 전『소크라테스의 변론』(플라톤 지음, 박종현 역주, 서광사, 2003)을 읽으면서「참 지성인, 소크라테스」라는 글을 작성한 바 있다. 소크라테스의 삶이 조선의 선비의 삶과 많이 닮아 있음에 놀라기도 하고 흥미를 가지기도 하면서 그 관련성을 검토해가면서 소크라테스의 지성인다운 모습을 추적해보는 작업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당돌하다 싶은(?) 작업이었지만, 나에게는 무척 의미있는 작업이었다. 아름다운 삶이 과연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파고 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가 죽는 장면과 퇴계 이황 선생이 생을 마감하는 장면이 묘하게 오버랩되었던 그 기억은 지금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의 나이가 어떻든 지금 사는 이 시간 뒤로는 모두 후반인 셈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될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 한 가지는 알고 있다. 우리는 인생의 후반을 아름답게 살고 싶다는 것. 아름다운 삶. 그것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이 책은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추구해온 그 의문을 해결하는 작업에 대한 하나의 답이다. 문이라는 소재를 활용하여 아름다운 삶이 과연 무엇인가를 추적해들어가는 독특함을 보이고 있다. 각 문에는 나름의 과제가 주어지고 우리는 끊임없이 도전을 받는다. 그리고 그 도전을 넘어서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들, 그리고 나를 되돌아보며 실천해나가는 것으로 매듭지어진다. 그렇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과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도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는 큰 선물들이 주어질 것이고, 그 선물들 또한 끊임없는 반추와 실천의 과정이 있어야만 온전히 나의 것이 됨을 이 책은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온전히 나의 것이 되어야 할 선물들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여기서 다시 문의 역할에 주목해봐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디를 들어갈 때 어김없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 문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경계, 단절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과 외부의 접촉이요, 소통과 통합의 장이며, 조화의 세계임을 이 책의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문득 ‘집 안에서 우주를 본다’는 옛 말씀이 생각나 순간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저자는 각 문을 통과해 걸어가는 길을 진정한 나를 향한 돌아감의 긴 여행으로 바라보고 있다. 곧, 사회적 가면을 벗고 참된 나를 찾아가는 여행, 몸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그대로의 몸을 인정하는 여행, 관계 속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용서와 이해로 풀어가는 어려운 여행, 창조와 생산과 조력을 쉼없이 하는 여행, 가식과 허위를 깨뜨리고 신뢰와 인품과 지혜를 쌓아가는 여행, 행복과 만족과 평화를 찾아가는 여행, 그리고 궁극에는 모든 것을 초연하고 해탈하는 여행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이러한 참 나를 찾아가는 긴 여행을 동·서양의 고전과 명인들의 명언을 넘나드는 해박한 식견과 탁월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특히 이 거룩하고 아름다운 여행을 발에 비유하여 발에 관한 명언들을 각 문의 끝에 배치한 것은 참으로 놀랍다.
 
바로 그렇다. 아름다운 삶.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 속에서 얻는 행복과 사랑. 그것은 어찌보면 단순할 수도 있지만, 허상의 ‘나’를 버리고 참 ‘나’를 찾아가는 인류의 거룩하고 위대한 여정의 한 디딤돌이기 때문에 세상 그 어느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문득 선비를 떠올렸다. 유학의 경전 가운데『대학』(大學)이라는 책이 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내용이 바로 여기에 실려 있다. 그런데 수신이 시작이 아니다. 나를 갈고 닦기 위해서는 그 앞의 과정들이 있다. 먼저 세상 사물들의 모든 이치를 지극히 탐구한 뒤에라야 앎이 지극해질 것이고, 그런 뒤에 뜻이 성실해지면 마음이 바로 설 것이며, 마음이 바로 선 뒤에라야 비로소 자신의 몸이 닦여진다 했다.

그렇다. 그런 자신과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과 치열한 탐구, 그리고 나름의 끊임없는 창조가 있은 뒤에라야 나의 중심은 바로 설 것이며, 바로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헛됨을 버리고 참됨을 찾아간다는 것. 그런데 유의할 것은 이것이 모든 것을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삶을 의미있게, 치열하게 살아가는 속에서 참된 나를 찾아가라는 뜻이다. 불교의 유명한 ‘색즉시공’(色卽是空)의 참 뜻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다. 우리 선비들의 삶이 그렇게 그리운 이유도 다 여기에 있음이리라.

물론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지금의 나를 온전히 가누기에도 힘든데 참 나를 찾아가는게 무슨 의미가 있나?”, “참 나를 찾아가면 물질적으로 뭐 나오나?” 그렇다. 나 또한 이 책의 문들이 상징하는 깊은 상징, 은유, 비유를 소화할 능력은 아직 없다. 또 이런 이야기를 하는 나조차도 뜬구름 잡기 하는 것이 아닌가도 모른다. 이상을 실현하는 것은 참으로 멀고도 고단한 여정이다. 하지만 인류는 그 멀고도 고단한 여정을 지난 수백만 년 동안 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해나갈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좀 더 아프지 않게, 좀 더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나가고 있다.

그리고 나는 위의 이야기가 뜬구름 같다고 비웃기도, 또 비관적으로도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인류의 영원한 큰 스승인 퇴계 이황 선생이나 마더 테레사 수녀, 2차대전 당시 수많은 사람들의 육체와 정신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사람 죽이기를 밥먹듯 했던 일본군, 그리고 지금의 ‘나’. 시대상으로, 인간상으로도 너무도 달라보이는 이들 모두 사실은 나름의 삶의 길을 걸어온, 그리고 걷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그 선택의 키는 전적으로 나 자신에게 쥐어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오래 두고 끊임없이 나를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데 중요한 삶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할 것이라 여겨진다.

* 참 고 문 헌 * (이 서평을 쓰는데 약간 활용하였습니다.)

성백효 역주,『현토완역 대학·중용집주』, 전통문화연구회, 1991.
플라톤 지음, 박종현 역주,『(플라톤의 네 대화편)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서광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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