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인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주어진 시간적, 공간적 상황을 떠나 어김없이 굴곡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지형(地形)의 다양함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 병법으로 유명한 손자(孫子)는 지형을 잘 파악하는 것을 장수가 전쟁을 준비하면서 갖추어야 할 중요한 요소로 이야기하고 있다. ‘나’라는 사람은 어찌보면 나의 육신과 정신을 이끌고 가는 리더인 셈이다. 결국 내가 겪는 인생의 역정을 긍정의 힘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것, 그래서 세상의 발전의 한 밑거름이 되는 것. 그것이 아름다운 나로 살아가는 중요한 방법이 아닌가 한다.『제인 에어』는 그런 나의 생각을 한번 돌이켜보게 해주었다.
솔직히 초반은 잘 읽히지 않았다. 원래 나는 어두운 삶 속에 비치는 가족 간 물어뜯는 모습(?)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수한 선비들의 아름다운 삶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배다른 어머니, 또는 자식임에도 전혀 그런 의식을 가지지 않고 생활하고 있음이 보인다. 나 자신 스스로 그런 긍정과 승화의 힘을 믿기에 이런 부분이 나오는 작품이나 극은 아예 접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초반은 껄끄러웠고 빨리 넘어갔다. 하지만 제인 에어가 10살의 나이에 집을 떠나 학교로 들어간 그 이후의 삶은 나를 시종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긍정과 승화의 힘, 시대의 한계와 저항, 편견을 과감히 부수고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는 에어의 모습, 이런 것들이 나를 그토록 매료시킨 건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사람의 삶과 그 속의 수많은 가치들에 관해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씩 적어나갔다. 편견(선입견)이 지니는 무서움은 어느 정도일까? 도대체 무엇이 진정 참이고, 무엇이 진정 거짓인가? 감정과 이성의 조화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허영, 교만, 사치, 이기심, 시기, 교태, 아양이라는 것들 속에서 인간은 얼마나 천박해질 수 있는가? 교양과 천박함의 기준은 무엇일까? …….
나는 이런 생각을 부족함없이 할 수 있을 만큼 어렵지 않게, 재미있게 읽어나갔다. 역시 번역의 힘이란 무섭다. 우리 고전은 한학자들의 수준 높은 국역이 이뤄지지만 일반인들이 대하기에는 어렵다. 다른 외국 고전은 일본어투가 너무 많고 외국어가 지니는 묘미를 살리지 못해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번역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주는 의미있는 것이라 하겠다. 깔끔한 번역이란 이런 것을 말함이겠다.
물론 소설을 읽으며 내 나름의 생각도 있었다. 작가는 제인 에어나 로체스터를 어떤 생각으로 다루었을지는 몰라도, 나는 그들의 삶에 대해 무조건 긍정적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들의 삶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이유는 비록 이들이 소설 속 인물일지라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 현실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제인 에어는 시대를 아름답게 살아나가는 한 여성임에 틀림없어도 자신만의 편견에 갇혀 사는 어리석음도 보여주었다. 로체스터도 형식이나 가진 것에 대한 자유로움이 있고 진실된 모습도 있지만, 곳곳에 쓰라릴 만한 위선과 자만이 보인다. 그렇게밖에 볼 수 없는 이유는 이러하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가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그 나름의 소명이 있다. 하지만 제인 에어나 로체스터의 경우 그들 자신의 세계관 속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다. 제인 에어에게 비친 잉그램 양이나 리드 부인, 로체스터에게 비친 아델라가 그런 경우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인 잉그램 양, 리드 부인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더 말하지 않겠다. 그런 의미에서 제인의 어릴 적 친구인 헬렌이 주는 가르침이 새삼 크게 느껴졌다. 갇혀 살지 않기를, 조화로운 삶을 살기를, 긍정과 승화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헬렌은 어린 나이임에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소설의 전반에 흐르는 제인의 사랑에 관한 것도 그녀다운 삶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쳐야 될 듯싶다. 결말로 나아가는 전개는 다르더라도 어떻게 끝날 것인가는 뻔히 예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결말을 알면서도 극이나 소설을 본다. 나도 그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그만큼 강한 흡입력을 지닌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세상이 발전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시대에 대한 저항도 있겠지만, 시대를 긍정하는 속에서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과감하게 자신을 다듬고 개척해나가는 것이다. 소설 속 제인의 18세 이후의 인생 역정이 더욱 빛나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그녀 또한 그녀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고, 어린 시절 헬렌에게서 보였던 긍정과 승화, 그 속에서 나오는 재창조의 위대함을 잘 이해해나갔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한 가지 더 생각해본 것은 우리 모두가 생각의 외연을 넓혀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생각나는 여러 가지를 정리해보았다. 허상의 파괴, 진정한 종교의 의미, 불교의 해탈, 일제 강점기 당시의 우리의 시대상, 그 속에서의 우리 시민들의 삶과 희망, 참 선비의 모습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런 것들과 이 소설 속을 이른바 ‘크로스 오버’해본다면 보다 다양한 생각이 나올 수 있을 것이며, 그에 따라 다양한 관점의 서평도 나올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