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리뷰] 이병한의 아메리카 탐문
ENergy flow 2025/12/26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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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한의 아메리카 탐문
- 이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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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 - 2025-06-20
: 14,531
_ 한 때 “연암 박지원처럼 생각하고 유발 하라리처럼 쓴다”는 극찬을 받기도 했던, 대작 <유라시아 견문>(3부작)의 이병한 저자 신간이다. 사실 <유라시아 견문> 이후, 특히 ‘테크놀로지’와 ‘개벽’에 너무 경도된 것처럼 보였던 최근 몇 년의 글은 다소 실망스럽기도 했는데, 이번엔 흥미로웠다. ‘자유로운 통찰’과 ‘관념적인 경박’을 넘나드는 글쓰기, 이번에는 전자가 훨씬 우세했다.
_ ‘역설’의 책: 다 읽고 나면 매우 ‘역설적인’ 측면들을 생각해보게 된다. 사실상 저자는 “아메리카에 시원섭섭한 작별 인사”를 고하고 “사시사철이 생겨나고 천지가 개벽하는 뉴-시베리아를 견문”하고자 이 책을 썼다(272쪽). 즉, ‘뉴 노멀 탐문’의 프롤로그인 것이다. 아마도 이를 위해서는 ‘마지막’으로 “미국에 재차 주목”하는 게 필요했을 듯하다(7쪽). 그래서 미국의 ‘10퍼센트의 가능성’에 주목해(다극세계가 도래하고 미국 패권이 몰락할 확률 60, 미국이 극적으로 붕괴하고 마치 구 소련처럼 쪼개질 가능성 30, 미국이 다시 세계패권을 쟁취할 확률 10),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이들에게 ‘빙의’하여 그들의 논리와 사상을 살핀 것이다. 그런데 또한 흥미롭게도, 이 책이 ‘요즘 미국의 생각을 알고 싶다’는 미국 주식 투자자 유튜브 채널에서 적극 호명되면서 높은 판매고를 올리는 중이다. 저자의 집필 동기와 결과물, 책의 지향과 독자의 필요가 묘하게 역설적으로 맞물렸다.
_ 저자는 트럼프 2기 MAGA의 등장을 미국판 “문화대혁명”, “위정척사”, “테크노-유신”이라 명명한다. 대내외적 미국 리버럴 패권의 실패에 대한 내부의 ‘비상계엄’ 같은 상황이라는 것이다. 결코 “위대한 미국 패권”을 포기할 수 없는 “자랑스런 미국인”들이 트럼프의 ‘킹메이커’였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이들의 반리버럴 미국 재건 구상을 파악하기 위해, 그 핵심인물 4명을 파악해보자는 것이다. 페이팔 마피아 피터 틸, 각종 X의 수장 일론 머스크, 팔란티어테크놀로지의 ‘철학자’ 알렉스 카프 그리고 “힐빌리의 노래”의 J. D. 밴스가 그들이다. 사실상 3명의 ‘기술’ 야심가(이자 자본가)와, 이들과 교감하는 1명의 ‘종교’적 인물이다. 본문의 상당량은 이들의 과거 행적, 현재 활동, 미래 구상을 다룬다.
_ 장기주의니, 초인간주의니 하는 말들로 현란하게 포장되지만, 한마디로 내게는 ‘기술’의 탈을 쓴 미국 패권주의 지향 반리버럴 파시스트들로 보였다(밴스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다만 밴스라는 인물 자체보다도, ‘종교’적 영향력이 ‘기술’과 결합하는 양상이 더 흥미로웠다.)
_ 아메리카라는 파시즘, 기술과 종교: <칼 슈미트, 정치신학에서 지정학까지>(2024, 진인진)에서 저자 이해영은 미국 패권의 몰락 속에서 ‘미국 정치의 리버럴이 3기 네오콘으로 전이’되는 “리버럴 파시즘”의 생성을 지적하면서, “21세기 슈미트”의 재림을 추적할 것을 제기한다. 이 문제의식을 위의 내용과 연결해서 확장하면, ‘아메리카라는 파시즘’에 대해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리버럴이든 반리버럴이든 “미국의 패권에 집착”하면서 인간에 대한 “파괴와 폭력”에 대내외적으로 둔감한,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이라는 틀 속에 이들 모두가 있다. 여기에서 결정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기술’과 ‘종교’다. 슈미트의 사상은 정치를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투쟁”으로 규정한 사실상의 ‘신학’(부정적인 의미의 ‘종교’ 체계)과 제국주의적 침략과 패권을 학문화한 ‘지정학’을 핵심으로 한다. 기술에 대한 신봉을 바탕으로 절대적 권위의 자리에 자신들과 ‘미국’을 놓고 세계의 모든 것을 좌우하려는 “21세기 슈미트의 지도부”는 실리콘밸리의 사이비 ‘테크노 철학자’(이자 자본가이자 셀럽이자 정치인)들일지도 모른다. 이런 이들에게 80억 인류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생각하면 아찔하다.
_ ‘빙의’의 글쓰기라고는 하지만, 사실 저자도 이런저런 ‘테크노’적 사고에 꽤 물들어 있는 듯보인다. ‘피지털’ 세계의 발전에 (최근 담론에서는 AI와 로봇의 결합) 심취한 나머지, 땅과 노동, 자연과 인간의 현실로부터 유리된 듯한 언술은 저자가 출발했던 유라시아, 다극세계의 견문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엇나간다. 호쾌하게 패권을 넘어서는 이야기와 허황되게 관념적인 언사가 묘하게 뒤엉킨다. 아직 저자의 사유도 현실 속에서 계속 변화하는 듯하다.
그래서 더욱, 저자가 ‘테크노 차이나’를 거쳐 새롭게 쌓아 나가려는 뉴 코리아, 뉴 시베리아 견문이 어떤 내용일지 궁금하다. 최근 한미 팩트시트 사태에서 드러난 것처럼, 여전히 한미동맹 속에 스스로를 옭아매는 한국의 현실을 박차고 도약하는 패기 넘치는 내용일까. 그의 다음 저술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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