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혈귀 계월은 온갖 실험을 당하다 탈출하여 경성의 여학교 기숙사 사감선생으로 신분을 위장한다. 그곳에서 다른 선생들의 피를 빨아 먹다가 희덕에게 들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인간들의 기억을 지우고 조종할 수 있는 계월의 능력이 희덕에게만 통하지 않는다. 계속 되는 우연으로 새로 온 사감선생의 비밀을 알게 된 희덕이 그녀의 정체를 파헤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두 주인공의 설정이나 이야기의 시작 때문에 이 소설이 단순히 흡혈귀라는 소재만을 다룬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읽다 보면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역사적 사건이나 조선인 여성의 이야기에 주목하게 된다.
희덕은 좋지 않은 형편에도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으로 진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아이다. 손녀를 끝까지 가르쳐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유언이 있었기에 희덕은 경성으로 올라와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학교에서는 조선어를 쓰면 매를 맞고, 순종스러운 여성이 되기 위한 자수 수업 같은 것들을 배운다. 흡혈귀라는 소재는 이 소설에서 재미를 더하는 요소이고, 재밌는 소재와 함께 시대적 상황이 선명히 그려져서 좋았다.
또, 책을 읽으면서 장면 전환이 굉장히 빠르다고 느꼈는데 나중에 작가 소개를 다시 읽어보니 웹툰 작가로 활동하고 계신다고 한다.
영어덜트 문학은 굉장히 오랜만에 읽어보는 것 같은데, 장면이 직관적으로 그려지고 전개가 빨라서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10대 초반 독자들도 재밌게 읽을 수 있을 이야기였다. 특히 1930년대를 배경으로 진취적인 여성상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여자 아이들에게 꼭 추천해주고 싶다.
아마 조선어가 아니었어도,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어도 남자의 눈동자를 보고 규수는 모든 뜻을 짐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운명을 내맡겼을 것이다.
나와 함께 갑시다.
신의 은총도, 악마의 축복도 함께 있을 것이요.
김나경, 『1931 흡혈마전』, 창비, 66쪽.
"여성에게 중요한 것은 결혼 상대를 고르는 것만이 아니야."
단이는 동백의 말을 바로잡아 주었다.
"곱게 보이는 것도 아니고, 공부를 잘하거나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는 모습도 아니지.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자기 스스로의 의지대로 삶을 살아가는 자세야. 당연해 보이지만 연습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 말이야."
김나경, 『1931 흡혈마전』, 창비, 1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