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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아나님의 서재
  • 라파엘로가 사랑한 철학자들
  • 김종성
  • 18,000원 (10%1,000)
  • 2023-02-14
  • : 342

오랜만에 즐거움이 많은 책을 발견했다. 다른 책들도 물론 재밌는 걸 많이 주지만, 속칭 '통섭'이라고 하는, 철학과 다른 주제를 섞어서 설명하는 책들 중에 재밌는 책을 발견한게 오랜만이다. 


예전에 주영민 씨의 [가상은 현실이다]라는 책을 읽었을 때 이런 느낌이 들었다. 다양한 분야의 내용을 엮어서 설명하는데 내용들이 그저 물리적 결합 정도에 그친게 아니라, 화학적 결합까지 가서 하나가 된 느낌. 그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동안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리스 철학에 대해서는 얼핏 주워들은 게 있지만, 최신 과학 흐름이나 수학 사상과 같은 자연과학적 지식은 잘 몰랐기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며 연결고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칫 사변적으로 흘러가기 쉬운 철학적 내용에서 자연과학적인 내용을 통해 보완하고 왜 그런 사변적인 흐름이 전개되었는지까지 설명해주기 때문에, 단순히 철학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다른 측면에서도 관찰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어쩌면 이 책을 통해 더 깊이 관찰하는 법을 배우는게 이 책의 가장 큰 가치일지도 모르겠다.


p.18~19

[아테네 학당]에는 고대 그리스의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 대부분이 모여있다. 그런데 사실 바티칸 궁전에 이들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아이러니한 일이며, 지난 역사를 고려해보았을 때, 특히 교황의 궁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려져 있다는 것은 매우 놀랍다. 1231년 가톨릭 교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누군가가 읽거나 가르치면, 그를 파문하는 것에 찬성할 정도로 아리스토텔레스에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대한 신학자로 칭송받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회와 아리스토텔레스를 화해시키는 데 성공한 이후, 가톨릭 교회는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이교도적 의심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바티칸 궁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려지는 것을 허용했다. 어찌 보면 토마스 아퀴나스 덕분에 [아테네 학당]이 그려질 수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으니, 우리는 라파엘로와 동등하게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도 고마움을 표해야 할지도 모른다. 


p.32

[티마이오스]의 중반에서, 플라톤은 불, 물, 흙, 공기의 네 가지 물질이 우주의 구성물이라고 언급한다. 이는 플라톤 이전의 철학자인 엠페도클레스의 사상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엠페도클레스 또한 만물이 불, 물, 흙, 공기의 네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신이 우주를 질 서 지우는 일에 착수했을 무렵, 처음에 불과 물과 흙과 공기는 자기들의 며쳐몇 흔적들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것들은 마치 어떤 것에서 신이 떠나 있을 때 모든 것들이 처할 법할 그런 상태에 전적으로 놓여 있었던 것이지요.

- 티마이오스, 플라톤


하지만 플라톤은 엠페도클레스의 주장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피타고라스의 수비학과 기하학을 결합하는 일종의 재치를 발휘한다.


바로 그때 그렇듯 원초적인 상태에 있었던 그것들에 대하여 신은 도형과 수를 가지고 형태를 부여해 나갔던 것입니다.

- 티마이오스, 플라톤

p.35

Quintessence(퀜테센스)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조금 생소하긴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인지 이 단어는 공상과학영화와 대중매체에 꽤 자주 출현한다. 그리고 'Quint'가 '다섯', 'Essence'가 '본질' 또는 '정수'를 의미하고, 정십이면체가 '정오각형'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 단어가 플라톤의 다섯 번째 입체, 즉 우주를 지칭하는 데 적합하다는 것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들은 [티마이오스]에서 도발적으로 주장된 플라톤 입체에 관심을 많이 가졌는데, 특히 플라톤이 제일 말하기 꺼렸던 정십이면체에 천착한 작품들이 많다.


p.36

우리에게 조금 더 잘 알려진 예술가, 살바도르 달리가 그린 [최후의 만찬 성사]에서도 예수와 제자들을 둘러싼 플라톤 입체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신과 우주를 연결짓는 기하학적 도형으로 정십이면체만큼 좋은 오브제는 드물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숫자 12의 천상의 성찬식에 기반한 광휘와 피타고라스적 순간성을 구현하길 원했다. 하루의 열두 시간, 일년의 열두 달, 정십이면체의 열두개의 오각형, 태양을 도는 황도 12궁, 그리고 그리스도 주변의 열두 사도.

- 살바도르 달리

p.43

실제로 공기 중에 존재하는 산소 분자는 산소 원자 두 개로 이루어져 있고, 산소 원자를 깊게 파고들어 가면 양성자 여덟 개와 이와 비슷한 개수의 중성자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원소의 양성자 개수가 여덟 개라면, 우리는 그 원소가 분명히 산소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어떤 원소를 결정짓는 핵심은 바로 양성자의 개수이다.


다시 말해, 어떤 물질의 양성자의 개수를 안다는 것은 그 물질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다는 말과 동일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학창 시절 화학 시간에 '주기율표'를 열심히 외우라고 강요받는 것이다.


p.50

이제 과학자들은 세상이 물, 불, 흙, 공기와 같은 정다면체가 아니라, 페르미온이라 불리는 입자와 보손이라 이름 붙은 입자 그룹들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p.58

'선'이라는 개념도 조금 이상한 구석이 있다. 사실 어떤 대상이 '선'이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폭'이 없어야 한다. 만약 '폭'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넓이'를 가지는 2차원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클리드는 선을 '폭이 없는 길이'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이 정의는 우리의 의혹을 더욱 증폭할 뿐이다. 우리가 인지하는 공간은 3차원이므로 실재하는 어떤 대상이든 가로, 세로, 높이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점'과 '선'이란 애초에 실제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저 가상의 '수학적 구조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더 정답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p.59

다시 강조하지만 '부분이 없는' 유클리드의 '점'은 수학적 이상 세계에나 성립할 수 있을 뿐, 일상적으로 '감각'되는 세계에서 우리는 절대로 유클리드의 '점'을 찾아낼 수 없다. 이상을 현실 세계로 불러낼 수 없다는 것. 이것이 현실 세계에 '완벽한 원'을 재현하기 위해 극복되어야만 하는, 그러나 극복될 수 없는 중대한 문제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유클리드가 말한 '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완벽한 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대상이 현실에서 완벽하게 구현될 수 없거나 심지어 존재할 수 없다는 문제각 우리의 '이해'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 이것은 분명 이상하고 기묘한 일이다.


p.60-61

도형을 다루는 기하학의 토대는 이데아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완벽한 직선, 완벽한 각도를 가정하지 않으면 기하학은 무너져내리고 말 것이다. 진정한 직선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정해버리면, 정사각형과 같은 도형도 존재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하학은 완벽한 이데아와 세계 안에서 작동한다. 그러니 플라톤이 세계의 근본을 규정하는 4원소를 기하학적인 정다면체에 대응시킨 것은 그의 '이데아' 이론에 비추어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p.88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진 세계의 인식 모델을 아우구스티누스적 모델에 큰 충돌 없이 결합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그는 기존 아랍 세계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진 '이단적 성격'을 가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들, 특히 아랍 철학자인 아베로에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를 비판하기 위해 [아베로에스 비판을 위한 지성 단일성]을 저술하는 등, 가톨릭 신학 내부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건전하게' 적용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또한 [신학대전]과 [대이교도대전]을 저술하여 '영혼만이 인간의 인식 요소가 아니라 '육체'와 '감각'도 인식의 핵심요소라고 주장하며, 아우구스티누스로 인해 갇혀있던 인간의 인식 모델을 확장하고자 시도했다. 


p.95

우리는 안티고네의 고통과 고뇌에 공감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윤리와 도덕이 충돌할 수 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최고의 문학비평가로 평가받는 노스럽 프라이는 비극에 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한 바 있다.


비극, 말하자면 비극적 주인공에게 일어나는 특수한 사건은 이 주인공이 도덕적으로 옳으냐 옳지 못하냐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비극은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주인공의 행위와 인과관계를 맺고 있기는 하지만, 그 비극성은 주인공의 행위의 귀결이 지니는 불가피성에 있는 것이지, 주인공의 행위가 지니는 도덕적인 정당성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비평의 해부, 노스럽 프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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