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팬데믹 : 여섯 개의 세계
1. 팬데믹XSF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한 폐렴'이라고 불릴 때, 폐쇄된 우한의 실시간 상황이라며 떠돌던 영상들과 텅 빈 명동거리 사진을 보면서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아포칼립스를 연상했다. 그 한두 달 간의 뒤숭숭했던 공기를 기억한다. 이후 몇 번의 분수령을 거쳐 다다른 지금 여기는 어느 때보다도 미래와 가까운 것 같다. 아니 언제나 지금이 가장 미래와 가까우니, 대신 시시각각으로 도래하는 미래를 어느 때보다 더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게 맞겠다. 돌아보지 않으려면 앞을 보는 수 밖에 없으니까. '돌아갈 수 없다'는 문장을, 술자리에서 나의 스무 살을 아쉬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늘 관심 밖이었던) 인류의 운명을 애도하기 위해 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맨 얼굴로 가을 바람을 맞고 친구들과 내킬 때마다 어디서든 술을 마시고 여행을 떠나고 날마다 수영을 다니던 시절로 당분간은-이라고 간절하게 덧붙인다-나는, 또 우리는 돌아갈 수 없다.
과거와의 깊은 단절로 우리는 미래를 날카롭게 실감하는 중이다. 더 외롭고 차가울 미래를 예감하고 아주 조금이나마 나아질 미래를 소원하면서. 이런 상황 속에서 SF는 시기 적절한 장르가 되었다. 코로나(팬데믹)과 SF를 크로스한 기획이 놀랍지 않았던 건 그 때문이었다. 어쩌면 당연하고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상상력으로 알 수 없는 미래를 메우고 불안한 현재를 위로 받을 수 있다면 말이다. 그렇기에 <팬데믹 : 여섯 개의 세계>의 표지 뒤, '우리에겐 더 많은 상상력이 필요하다'라는 문구에 고개를 크게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책은 Apocalypse : 끝과 시작 / Contagion : 전염의 충격 / New normal : 다시 만난 세계, 총 세 파트로 나뉘어 있다. 각 파트엔 두 개의 글이 실려있는데, 그 중 가장 따뜻하고 유쾌하게 읽은 김초엽의 <최후의 라이오니>와 배명훈의 <차카타파의 열망으로>에 대해 짤막하게 써보려 한다.
2. 김초엽, <최후의 라이오니>
<최후의 라이오니>엔 보편의 인간 종보다 훨씬 담대하고 강인하며 용감하다는 종족, 로몬이 등장한다. 로몬은 죽음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거의 없기 때문에 우주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멸망을 기꺼이 목격하고 분석하길 원한다. 그들은 폐허에서 남은 자원과 정보를 회수하여 우주의 다른 공간으로 보내는, 태생적인 회수인이다. 그러나 주인공 '나'는 로몬임에도 불구하고 멸망에 대해 너무도 구체적으로 두려워 하는 별종이다. 그런 '나'에게 어느 날 시스템은 의문의 거주구 3420ED의 단독조사를 의뢰하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쓸모 있는 로몬으로 거듭나기 위해 묘한 끌림과 함께 그곳으로 떠난다. 이미 멸망한 줄로만 알았던 그곳에서 '나'는 기계들과 조우해 '라이오니'라는 이름을 처음 듣게 된다.
'나'는 김초엽의 전작 <인지 공간>의 이브와 마찬가지로 그가 속한 세계의 기준으로 '열등하다'. 열등함은 사회가 그들에게 지운 한계에서 비롯되는 특성이다. 지식의 거대한 구조물은 이브의 작은 체구를 허락하지 않는다. 로몬의 임무 또한 '나'의 두려움을 용인하지 않는다. '약함'은 그들의 사회에서 결함이고 제외의 대상이다. 그러나 김초엽의 시선 안에서 그들의 약함은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이 된다. 이브는 인지 공간의 바깥을 상상했고, '나'는 누구도 가치를 두지 않는 행성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깨닫고 의연히 멸망을 지켜본다.
김초엽은 '미래 사회에서까지 차별과 배제가 공고히 유지되는 이야기를 써야 하냐'는 물음에 '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모순에 맞서며 다른 세계로 가는 길을 애써 상상해 보는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 말대로다. 김초엽의 미래에선 지금과 다를 바 없이 누군가 소외되고 '잘못된 종에 갇혀 있다는 감각'을 느낀다. 그러나 그 미래에서 그들이 반드시 스스로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함으로써 김초엽의 SF는 완성된다.
<인지 공간>에 이어 <최후의 라이오니>에서도 김초엽은 사회의 '완전한' 몸만을 위한 설계를 성찰한다. <최후의 라이오니> 속 불멸하는 존재들을 위한 행성(3420ED)은 질병과 사고에 정신적으로 전혀 대비되어 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몸이야 언제든 교체하면 되는 것이기에 불멸인들은 질병과 장애, 노화와 죽음에 무지한 채로 사회를 설계했을 것이다. 책에는 그들이 죽음이 발생하자 준비되지 않은 공포 때문에 패닉에 빠지는 모습이 주로 묘사되었지만, 행성을 걷잡을 수 없이 멸망으로 내몰았던 건 이제 다치고 아프고 늙게 된 몸을 감당할 수 없는 사회의 물리적 설계 방식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행성의 멸망은 일종의 경고처럼 느껴진다. '완전한' 몸에 대한 열망으로, 우리의 몸이 병들고 장애를 가지고 늙을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설계되는 우리 사회를 향한 경고. 결국 그 안에 누구도 살 수 없는, 잔인할 만큼 완벽한 구조를 김초엽은 믿지 않는다.
3. 배명훈,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처음엔 오타인가 싶었다. 시기 맞춰 급하게 나오느라 검수가 제대로 안 된 건가? 몇 문단을 더 읽고 나서 다시 제목을 봤다. 아 이 '차카타파'가 그 '차카타파'야? <차카타파의 열망으로>를 읽은 사람이라면 이게 무슨 말인지 단박에 알 것이다. 아직 안 읽은 사람이라면 진심으로 일독을 권하고 싶다. 읽는 데 다른 글보다 1.5배 정도 더 걸린 이 글이 이번 기획의 엑기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배명훈의 22세기 속 한국어엔 거센소리가 없다. 사람들이 2020년-대감염병의 시대를 통과하며 더욱 위생적인 생활양식에 집착하다 결국 '비말이 튀는' 거센소리를 사용하지 않기까지 이른 것이다. 된소리의 실종은 2113년의 뉴 노멀이 되었다. 그러니 당연히 22세기 인간인 '나'가 하는 모든 말엔 (그러니까 1인칭 시점으로 쓰인 이 글 전체에) 거센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런 설명은 21세기 독자가 '날자를 일괄적으로 득정할 수 없는 것은 분야마다 수집 기준일이 다르기 대문이다.''와 같은 문장에 충분히 당황한 이후에 주어진다. 처음 이 문장을 읽고 눈을 비볐다. 그리고 물었다. 지금 뭐가 잘못된 거지?
'나'는 2113년의 역사학과 학생으로, 논문 쓸 자격을 얻기 위해 격리실습을 하는 중이다 격리실습이란 현재라는 시간으로부터 격리되어, 2020년 5월 어느 날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정보만 모아놓은 근대사 아카이브에 4주간 기거하며 소논문 한 편을 완성하는 일이다. 실습 도중 '나'는 아카이브 방문객과 교류하면 안 된다는 규칙을 깨고, 유명 배우 서한지가 차기작을 위해 열람하는 영상자료를 염탐한다. 그리고 그 문제의 '거센소리'를 아주 강렬하게 듣고 보게 된다. 사극 배우들이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외치고 뮤지컬 배우들이 서로에게 거침없이 침 튀기며 노래할 때 '나'는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러나 노력 끝에 21세기의 발성법과 그 안에 담긴 진심까지 획득한 서한지의 한 마디를 듣고 나서 '나'는 거센소리, 즉 차카타파에 전율할 줄 아는 미래인이 된다. 달줄이 아니라 탈출이다, 가다르시스가 카타르시스다!
미래는 우주탐사, 타임슬립, 순간이동, 인공지능, 로봇 등 온갖(이라기엔 소박한 목록이다) 방식으로 상상 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아무리 그럴 듯하게 묘사돼도 어쩐지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 아마 상상의 바탕이 될 경험이 빈약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언어에 관해서라면 우리 모두가 전문가이다. 매분 매초를 언어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에게 언어적 변화는 어떤 기술적/물리적 격변 보다 더 날카롭고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다른 행성으로의 이주나 기계와의 우정보다 거센소리 없는 언어가 훨씬 더 실감난다는 얘기다. 배명훈은 그 점을 적극 이용해 독자들로 하여금 뉴 노멀의 미래를 언어적으로 직접 경험토록 한다. 독자는 차카타파의 부재 속에서 (더듬더듬) 글을 읽으며 차카타파를 열망하게 되고 종국엔 22세기 인간과 함께 차카타파의 카타르시스를 함께 느낀다. 이 때의 '차카타파'를 우리가 이전엔 당연히 여겼지만 더 이상 누리지 못하는 일상에 대한 은유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작가노드'로 완성되는 이 이야기의 기발함과 유쾌함을 코로나 시대의 많은 독자들이 즐겼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