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저를 설레게 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닥터 후> 스페셜, 다른 하나는 <콜 더 미드와이프> 스페셜입니다. 최근 몇 년간은 이 두 드라마의 크리스마스 특집 에피소드들을 보아야만 한 해를 제대로 마무리 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만큼 굉장히 아끼는 작품이기에, 언젠가는 꼭 원작을 읽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품은 채 지내고 있었습니다. 특히나 다수의 영국 드라마가 정식 번역되는 일이 드물기에, 원작의 번역서를 읽게 되리라는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번역 출간 소식을 접했으니, 그 기쁨이 어떤 것이었을지 짐작하실 수 있겠죠?
이 책은 제가 사랑하는 드라마 <콜 더 미드와이프>의 원작인, 제니퍼 워스의 회고록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궁핍했던 1950년대의 영국 런던 이스트 엔드를 배경으로, 소명에 따라 당시 의료지원이 절실했던 지역사회에 헌신한 성공회 수녀들과 책임과 사명을 다해 일한 전문 조산사들의 실화를 담담하게 풀어낸 수작이지요.
드라마의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하는 책의 제 1장 첫 구절을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도대체 내가 왜 이 일을 시작했을까?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누가 이런 일을 일부러 선택할까! 모델, 스튜어디스, 여객선 승무원…. 매력적이고 돈도 많이 버는 직업 수십 개가 순식간에 머릿속을 지나갔다. 모두 이 일이 아니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바보가 아니라면 간호사가 되는 길을 스스로 고를 리는 없다. 게다가 이제 조산사까지 하게 되다니.’ 이 뒤부터 풀어놓는 전문 조산사 제니 리의 쉴 틈 없는 일상과 각종 임상 사례들을 보고 있노라면 드라마로 각색된 여러 이야기들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저는 드라마를 먼저 접했기 때문인지, 이 책을 읽는 내내 제니퍼 워스의 서술과 BBC에서 각색한 부분이 어떻게 다른지에 집중하며 보게 되더군요. 시리즈 1과 2에 등장하는 인상적인 이야기들의 대부분이 책 한 권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습니다. 드라마에서 보았던 수녀들-시스터 모니카 조안, 줄리엔느, 에반젤리나, 버나뎃-과 제니의 동료들-처미, 신시아, 트릭시-, 프레드, 비 부인을 비롯한 세인트 레이먼드 노나터스 하우스의 개성 넘치는 사람들과 포플러의 공동주택을 가득 메운 주민들, 도크 거리의 도선사들과 항만 노동자들의 모습, 번화한 도시의 뒤편에 자리 잡은 어두운 사창가와 그곳을 가까스로 탈출했던 아일랜드 소녀 메리와의 짧은 교분, 기분 나쁜 사람이라 여겼던 젠킨스 부인의 안타까운 사연과 빅토리아기 구빈원의 참상 등이 보다 깊이 있게 다가왔습니다. 꼭 제 곁에서 노년의 제니(배우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차분한 목소리로 담담히 일러주는 것 같았습니다.
다만, 극적 효과와 이야기의 풍성함을 위해 다듬고 이어붙인 드라마와는 달리 저자가 겪은 삶을 오롯이 담아낸 이 책은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뿌리 깊은 여성혐오, 빈민을 구제한다는 명목 하에 빈번하게 이뤄졌던 인권유린, 인종차별 등-를 묘사하고 있고,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던 당시의 사회를, 지금에 와서는 거의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기존의 주류 역사에서 비껴나 있었던 조산사의 입장에서 서술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빛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나 그간 여성의 삶에서 가장 위험부담이 크고 힘듦에도 불구하고 미디어에서 늘 피상적으로만 보여줬던 임신과 출산 과정을 본격적으로 상세하게 실무자의 입장에서 다루었으며, 대도시 한편에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을 가감 없이 보여준 작품이기에 이 책을 아직 읽지 않은 여러분에게 특히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흔히들 선진국이라 일컫는 먼 나라의 과거 이야기라기엔 너무도 생생하고 보편적인 인간사를 그녀만의 뛰어난 필치로 그려내어 이국의 독자에게까지 깊은 울림을 주기 때문입니다.
서툴고 짧은 글을 마무리하며...
그동안 생업에 치이다 부득이하게 휴가 온 여행지에서 뒤늦게 서평을 올리게 되었네요. 우연한 기회에 기다려왔던 책을 좋은 이벤트로 만나게 해주신 도서출판 북극곰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저자의 글을 우리글로 막힘없이 읽어갈 수 있도록 애쓰신 번역가 고수미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