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에 대한 표절 논란이 일었을 때 어느 평론가가 그랬다. 둘 다 읽어봤는데, 조경란의 <혀>가 훨씬 완성도
있더라고. 그 발언에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작품의 완성도가 높기 때문에, 더 잘 썼기 때문에 표절 운운할 가치가 없다고 단정 짓는 그의
태도가 과연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의도로 그런 발언을 했든 작품의 완성도를 따지는 것은 표절이라는
본질을 왜곡하고, 표절 당한 사람을 폄하함으로써 결국에는 권력에 힘을 실어주는 행위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내가 <지상의 노래>가 표절 가능성이 높다고 본 것은 그가 <허물>을 심사했고, 심사평까지 썼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이폰의 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대변되는 일련의 문제 때문이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아이폰의 곡선은 설사 그것이 애플의 크리에이티브티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 할지라도, (실제로 스티브잡스는 애플
제품의 기능성보다 디자인에 집착할 만큼 디자인적인 요소를 중요시했고, 맥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아이폰의 디자인에도 둥근 조약돌로 대변되는 부드러운
곡선을 차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삼성이 그 사실로 언플을 하든, 그로 인하여 천하의 애플이 조롱의 대상이 되든 개인적으로는 애플 입장에서 충분히
논거로 제시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실은 누구나 가장 실용적인 스마트폰을 디자인하려면 어쩔 수 없이 수렴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방향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지상의 노래>를 읽고 표절 시비가 붙은 6장 카다콤에 대해서 석연치 않았던 것은 그것이 스마트폰이 디자인적으로 수렴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방향과는 거리가 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느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첫째는 <지상의 노래>의 후가 남자 미용사가 되는 과정이 부드러운 곡선의
그것처럼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이었다. 후는 누이가 미장원에서 일했다는 이유로 지역의 미장원을 두루 돌며 누이를 찾아나서는데, 뜬금없이 미용사가
된다. 그전에 미용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미용에 뛰어난 손재주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연관성이라고는 그의 누이가 미장원에서
일했다는 것밖에 없는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창작자 스스로도 이런 설정이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작품 속에서 미장원 원장은 그러지
말고 미장원에 취직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후에게 권유를 하고, 마침 그 미장원에 남자 미용사가 있어 후 스스로 남자도 미용사가 될 수
있다는 납득을 한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후가 미용사가 되는 것은 개연성이 부족하다. 누이를 찾아야 하는 목적을 가진 주인공이,
그것도 지역에 수십 개가 넘는 미장원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지역에서 지역을 넘어 누이를 찾아야 하는 주인공이, 업계 특성상 한두 달 머물면서 일할
수 있는 곳도 아닌 미용업에 종사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수십 군데에 한두 달씩만 머문다고 해도 한 지역을 도는 데 몇 년은 걸릴
성싶고 굳이 미용사가 되지 않더라도 곳곳의 미장원을 빠짐없이 훑으면 된다. 어쩌면 후는 실은 누이를 찾고 싶지 않았던 걸까.) 더구나 이전까지
미용 기술이라고는 전혀 없던 남자에게 불쑥 미용사를 해보라고 권하는 원장이나, 시대적 배경상 남자 미용사가 흔하지 않던 시절에 남자 미용사를
등장시켜가면서까지 후에게 미용사의 옷을 입히려 하는 것은 내 기준에서는 상당히 억지스럽다. 이것은 마치, 누이를 찾고자 하는 주인공의 여정에
가장 적확한 설정을 작가가 창조해낸 것이 아니라 미장원이라는 배경을 빌려 쓰기 위해 후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힌 듯한 인상을 준다.
또 하나는 미장원에 근무하면서 사모님에게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후에 대한 설정인데, 이 부분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후의 캐릭터와
일관성이 별로 없다. 초반에 후는 누이를 마음에 품은 데 대한 죄의식으로 기도원에서 매일 기도하며, 그리스 신화까지 끌어와 여러 지면을 할애해
자신의 내면을 탐색하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카다콤에서는 어떠한가.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빼내기 위해 사모님에게 성적 서비스를 제공할 만큼,
그리고 그러한 행위에 어떤 자의식도 가지지 않을 만큼, 심지어 그러한 행위에서 자신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성적 쾌감을 맛볼 만큼 욕망에
충실한 캐릭터로 그려진다. (이 캐릭터는 오히려 돈 되는 미용 기술을 배우기 위해 스스럼 없이 원장의 위크 포인트를 겨냥할 줄
아는 <허물>의 명규 캐릭터에 더 가깝다.)
내면의 죄의식과 욕망의 근원을 천착하는, 숭고하기 이를 데 없는 후라는 캐릭터가 어째서 카다콤에 와서는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아무렇지 않게
행할 수 있는 상이한 캐릭터로 변질되는 것일까. 이 과정은 자연스럽지 않다. 미용사 설정은 오히려 작가가 6장에 이르기까지 다소 진부하고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공들여 쌓아온 후의 캐릭터를 흔들고 무너뜨리는 데 일조한다.
6장 카다콤에서 작가가 캐릭터의 여정을 극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미장원이라는 배경을 채용한 것이 아니라, 미장원이라는 배경을 쓰기
위해 캐릭터가 무너지는 것을 방치한 것이 아닌가 어리둥절해한 것은 이 때문이다. 스마트폰의 부드러운 곡선으로 수렴하기 위해서라면 이러한
설정은 효과적이지도, 자연스럽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는 그저 내가 <지상의 노래>를 읽고 받은 인상일 뿐, 법적 시비를 가리자면 김주욱 작가가 불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봐도 원곡의 영향을 받았다고 느껴지는 상습적인 표절 작곡가라도 표절이 인정되는 마디 이상을 표절하지는 않는다. 하물며 문단에서
인정 받는 중견작가가 그렇게 뻔히 드러나는 수준 낮은 도용을 할 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만 놓고 봤을 때는 <표절>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감당하기에 작가의 역량이 아직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이번
기회를 계기로 서툴고 무딘 칼부림이 자신의 주장을 대변하는 데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작가가 깨닫게 되었으면 한다.
누군가는 우아하고 완성도 있는 도용 쪽이 거칠고 투박한 문제제기보다 성향에 맞을지도 모르겠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도용이라고 보는데, 왜 그렇지 않은지 납득시켜달라는 요구에 어떤 소통도 거부한 채, 스스로를 피해자로 규정짓고, (명성과 기득권이 있기에
가능했을) 해명성 소설을 문예지에 발표하는 사람 앞에서 '우아하고 품위 있게' 그저 침묵했어야 했을까. 무디고 투박한 칼이라도 휘둘러 천박한
칼춤이라도 추고 싶었을 작가의 심정에 마음이 기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여 나는 우아한 도용과 천박한 문제제기,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어쩔 수 없이 후자 쪽에 힘을 실어줄 수밖에 없다. 거친 문장으로 더듬거릴지언정, 그리하여 이 소설의 어느 부분에서 작가가 자기
자신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스스로 똥물을 뒤집어 쓸지언정, 누군가 한 번쯤은 문제제기 해야 할 소재였다고 여기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