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도 엄마들이 말하는 방법, 짧은 소리를 내고 귀여워 못 견디겠다는 얼굴로 함박웃음 짓는 방식은 알고 있었다. 그걸 누구보다 그럴싸하게 흉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이 견딜 수 없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P124
"죽음이 어떤 건지 알아?"
이마치는 영원히 젊은 그 청년을 놀리듯 물었다.
"알죠. 그건 고장난 엘리베이터 같은 거예요. 깊은 어둠 속을 한없이 하강하다가 마침내 쾅, 부서져버리는 거요."- P127
"여긴 그림자가 없네."
노아가 뒤돌아 벽을 보았다. 바로 그 순간, 벽에 그림자가 돋아났다. 얼룩 한 점 없는 하얀 벽에 검은 실루엣이 그려지는것을 그들은 동시에 목격했다.
"이래도 내가 잘못 봤다고 할 거야?"
이마치는 조용히 물었다.
"이건 무슨 평행우주 같은 건가? 아니면 내가 정말 신이라도 돼서 말씀으로 이곳을 짓고 허물 수 있는 거야?"
노아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P140
"시스템이 재정비되는 거예요. 당신이 정보를 주면, 건물이
판단하고 받아들이죠. 일종의 업데이트예요."
"업데이트? 건물의 조건이 바뀐다는 건가?"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건물은 끊임없이 학습해요. 살아 있는 생물처럼, 당신이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거나 알아차리면 그걸 반영해서 다시 구성되죠."- P141
새삼 저 상태로 드라마를 찍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당시 그녀가 맡은 역할은 한국 남자를 사랑하게된 늙은 게이샤였다. 그녀의 앙상한 몸과 텅 빈 눈동자가 비운의 인물과 소름 끼치게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았다. 주인공은 아니었으나 그 이상 강렬한 역할이었다. 그 역할로 인해 이마치는 자신의 커리어, 한계, 자질을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마치는 영혼이 몸과 분리되어 하늘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이었다. 육신이 움직이는 모양을 멀찌감치서 초연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채권자들을 달래기 위해 계속 일을 해야 했고, 집을 나간 아들은 소식이 없었고, 딸은 친척집에 맡겨둔 채였다. 그녀는 자멸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신기했다. 이만큼의 절망으로는 사람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 P169
이마치는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체호프의 「갈매기」. 나지막한 목소리로 외는 니나의 독백.
전 무대 위에 서면 취해요. 거기서는 나 자신이 아름답게 느껴져요. 여기 고향에 온 날부터 걸었어요. 걸으면서 생각했어요. 그리고 내 마음과 영혼이 매일매일 강해져가고 있는 걸 느꼈어요. 이제 알 것 같아요. 코스챠, 작가든 배우든 간에 우리 일에는 내가 꿈꾸었던 어떤 것들도 명예나 성공이 문제되는 게 아니고 어떻게 견디느냐, 어떻게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믿음을 갖고 버티느냐를 알아야 해요.- P175
노아가 정민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대한의 정민이 아닐지는 몰라도, 최소한의 정민이긴 했다. 한 방울 혹은 두 방울의 정민이라고 해도 이마치에게는 더할 수 없이 귀했다. 이마치는 그 사실을 노아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너는 나에게 정말 귀한 존재라고, 세상 무엇과도 너를 바꾸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게 꼭 지금이라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완벽한 순간, 앎이 은총이 된 순간에 이마치는 그저 아이들 곁에 좀더 머물고 싶었다.- P187
당신의 모든 걸 사랑하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사랑하는 건 당신의 표정이야. 세상에 실망할 대로 실망한 표정. 그런 한편으로 호기심을 버릴 수 없는 표정. 그러니까 이게 다는 아닐 거라는, 뭔가 더 남아 있을 거라는 일말의 기대가 담긴 표정. 그 표정이 당신을 배우로 만들었지. 사람들이 배우의 얼굴을 계속 보고 싶어하는 건 그 안에 어떤 약속이 있기 때문이야. 그건 아마도 미래와 희망에 대한 약속일 거야.- P190
그것을 다 잊어버리고,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에게도 비슷한 결락을 경험하게 했다. 아니, 그건 망각과 상관없는 삶의 방식이었다. 이마치는 다른 삶의 방식을 배우지 못했다. 생존 이상의 것, 그것을 꿈꿔본 적이 없었다. 알지 못하는 것을 꿈꿀 수는 없는 법이었다.- P198
이마치는 12월생이었다. 한 해를 넘겨 3월까지 살아남았고, 누락된 출생신고를 할 경우 쌀을 준다는 소문에 등 떠밀린 어머니에게서 마치란 이름을 받았다. 그러니까 모든 게 거짓말이었다. 그럴듯한 유년을 위해, 환상을 위해, 경멸과 수치를 면하기 위해 스스로 만든 거짓말. 결국 자기마저 속인 거짓말.- P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