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먼저 느낀 것은 통증이었다. 순간적으로 깊이 파고드는 예리한 통증, 그다음엔 밀쳐졌을 때 오는 충격과도 비슷한 통증. 창틀에 손을 올린 소년이 방 안으로 몰래 들어와 짧은 부츠를 신은 발끝을 달랑달랑 흔들었을때, 그의 작고 뾰족한 부츠 끝이 내 심장을 파고들더니 무심하게 걷어쳤다.- P15
심하게 걷어찼다. 그 통증이라면 잘 알고 있다. 고등학교1학년 때의 나에게 통증이란 이미 오랜 세월 동안 내 살속에 익숙하게 웅크리고 있다가 이따금 생각났다는듯이저릿저릿할 뿐이었다. 그랬던 것이, 넘어지기만 해도 자연히 눈물이 나던 네 살 때처럼 아팠다. 하나의 통점으로부터 쫙 퍼지듯이 육체가 감각을 되찾았고, 조악한 영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색과 빛으로 세상이 선명해졌다. 초록색의 자그마한 몸이 여자아이가 누운 침대로 팔랑팔랑달려가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 흔든다. 얘, 하는 사랑스럽고 맑은 목소리가 꿰뚫고 지나가자 피터 팬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분명 그날 내 머리 위를 날아다닌 그 남자아이였다.- P16
피터 팬은 시큰둥하고 건방져 보이는 눈을 반짝반짝빛내며 매번 열의를 담아 호소하듯이 대사를 외쳤다. 어떤 대사든 똑같이 발음했다. 억양도 없고 동작도 과장됐지만, 숨을 들이마시고 오로지 목소리를 내는 데만 열중하는 그처럼 나도 똑같이 숨을 들이마시고 거칠게 내뱉었다. 그와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나를 깨달았다.- P16
그가 마구 뛰자 운동 부족인 내 새하얀 허벅지가 안쪽에서부터 경련했다. 개가 그림자를 물어뜯었다고 우는 그를 보자 내게 전염된 슬픔까지 끌어안고 싶었다. 유연함을 되찾기 시작한 심장은 흐르는 피를 무겁게 밀어내어 굽이치며 뜨거운 기운이 돌게 했다. 밖으로 채 발산하지 못한열기가 움켜쥔 손이나 오므린 허벅지에 고였다. 그가 무턱대고 가는 칼을 휘두르고, 궁지에 몰리고, 그의 옆구리에 상대방의 무기가 스칠 때마다 내 장기에 섬뜩하게 칼날이 닿는 기분이었다. 배 끄트머리에서 그가 후크 선장을 바다로 떠밀고 고개를 든 순간, 어린아이답지 않은 그 냉정한 시선에 흥분해 떨림이 등줄기를 타고 내달렸다.
우아아, 얼빠진 혼잣말이 나왔다. 미쳤다. 대박이다, 일부러 머릿속으로 말해봤다. 이 아이라면 틀림없이 선장의 왼손을 잘라 악어에게 먹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쳤다, 대박이다, 집에 아무도 없으니까 큰 소리로 뱉었다. 들떠서 "네버랜드에 가고 싶다"라고 말했더니 나도 모르게 진심이 됐다.- P17
푸른 하늘과 구름과 파스텔 톤 무지개가 있는꿈속 같은 세트로 끌려갔는데, 어른들이 돌아다니는 곳은 어두웠고, 새까만 촬영 장비들 너머에서 물떼새 무늬원피스를 입은 어머니가 이렇게...... 손을 가슴 앞에서흔들었어요. 겨우 5미터 거리였지만 꼭 작별 인사 같아서울 뻔했는데 곰 인형이 이렇게, 아세요?"
"아, 슈왓치* 말이죠. 라디오니까 몸은 그만 움직일래요?"
"그러네.(웃음) 아무튼 곰 인형이 그렇게 하면서 반짝이는 새까만 두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거예요. 나는 울고 싶었는데 웃었어요. 곰 인형 눈에 비친 내 웃는 얼굴은 그야말로 완벽해서, 그때부터 매번 그 곰 인형이 같은동작으로 나를 웃겨줬어요. 그때 깨달았죠. 아, 만들어낸웃음인 걸 아무도 모르는구나,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하나도 전달되지 않는구나."- P25
"아니, 가끔 있어요. 언제부터 좋아했다거나 몇 년 전부터 응원했다거나 근황 보고 같은 자기 이야기만 잔뜩 적은 편지를 보내는 팬이요. 기뻐요, 기쁘긴 한데 왠지 심리적인 거리가...."
"그야 팬이 어떻게 알겠어요. 항상 우에노 씨를 보고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다고 곁에 있는 사람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죠. 대화하다가도, 지금 이 녀석 내가 하는 말이 뭔 소리인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이네 싶어요."
"앗, 설마 나도 그럽니까?"
"그게 아니라...... 아니, 모르겠네. 이마무라 씨는 적당히 칭찬하는 습관이 있잖아요."
"심한데? 나는 진심이라고요, 언제나.(웃음)"
"죄송, 죄송합니다.(웃음) 아니, 그러니까 가사를 쓰는지도 모르겠어요. 어쩌면 누구 한 사람쯤은 알아줄지도 모르니까, 뭔가 간파해줄 지도 모르니까요. 안그러면 못 버텨요, 무대에 서는 거요."- P26
눈을 떴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비로 인해 회색빛으로 자욱했다. 어두운 구름은 해변 가까이 서 있는 집들을 감추었다. 최애의 세계에 닿으면 보이는 세상도 달라진다. 나는 창문에 비친 어둡고 따뜻해 보이는 나의 입속 건조한 혀를 보며 소리 없이 가사를 흥얼거렸다. 이러면귀에서 흐르는 최애의 목소리가 내 입술에서 흘러나오는기분이 든다. 내 목소리에 최애의 목소리가 겹치고, 내 눈에 최애의 눈이 겹친다.- P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