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라의 홀로그램은 가상이지만 단순한 이미지는 아니다. 나와 상대 모두에게 실제와 같은 질감, 냄새, 형태 등을 가지고 기능한다. 내가 만들어낸 장미 향은 상대에게도 같은 장미 향으로 인지된다. 경주가 만든 커피 ‘장미 정원‘이 내게도 장미 정원인 이유다.
내 몸도 마찬가지다. 감정과 몸의 연계성을 완벽하게 구현해낸다. 의식 밑에서 무의식이 강력하게 작동한다. 신경의 피드백과 호르몬의 작용까지 똑같다. 덕택에 나는 홀로그램으로 구현된 내 몸을 물리적 실체로 자각한다.- P373
두 번째 깨달음이 왔다. 단순히 회고하거나 떠올리는 것만으로는 홀로그램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가 의지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불러내야 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를 기억하고, 아버지를 걱정하고 있는데도 아버지가 재현되지 않는다는게 그 증거였다.
문득 호기심이 생겨났다. 이 공간과 나 자체가 홀로그램이라면 장소 이동도 가능할까. 제이와 함께 살았던 원주의 집을 기억에서 불러내봤다. 다음 순간 나는 그 집 욕실에 서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모든것이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심지어 제이의 면도기까지도.
제이도 불러낼 수 있을까. 눈을 감고 제이와 살던 시절을 상상했다. 세면대 앞에 의자를 두고 앉아 스스로 이를 닦고 세수도 할 수 있었던 어느 날 아침을 소환했다. 눈을 뜨자 세면대 위 거울에 제이가 나타났다. 욕실 문틀에 한쪽 어깨를 기대고 서서 소리 없이 웃던 그 모습으로. 그때 했던 실없는 농담까지도 그대로였다.
"나는 집에서도 선글라스를 써야겠다. 눈이 부셔서 맨눈으로는 너를 볼 수가 없네."- P380
허둥지둥 제이를 기억에서 지웠으나 때가 늦었다. 유증기로 가득찬 공간에 정전기 한 점이 떨어진 것처럼 내 몸 전체에서 통증의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고통은 폭발적으로 연쇄하고 점증해서 삽시에 나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나는 밤의 사막으로 냅다 도망쳤으나 소용없었다. 고통의 화기가 너무 커서 차디찬 모래밭에 머리를 파묻고 싶은심정이었다.
나는 제이에 대한 기억을 압축해서 머릿속 한구석에 가둬놓았다. 다시는 화약고가 열리는 일이 없도록 빗장을 지르고 못질을 해버렸다. 아무리 그리워도 나를 태워가며 함께 살 수는 없었다. 그가 떠오르려 하면 다른 이들을 불러냈다. 친구, 직장 동료, 유학 시절 동기까지아는 이라면 모조리.
어떤 이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매 순간 이것은 허상이라는 자의식이 끼어들었다. 그들은 자기 의지로 움직이는 자가 아니었다. 내 기억이 만들어내는 대로 움직이는 자들이었다. 또 다른 고통을 상기시키는 촉매이기도 했다. 그 고통에는 분명한 이름이 있었다. 내가 떠나온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P381
더 견딜 수 없었던 건 롤라의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스스로 시간의 태엽을 감아야 했다. 아침이 왔구나, 생각해야 해가 떴다. 이제 잘 시간이야, 해야 어둠이 왔다. 나는 내가 만든 사막에서 모래알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내가 아는 온갖 것을 사막으로 불러들여 온갖 짓을 다 해도 시간은 줄어들지 않았다. 사막의 모래를 핀셋으로 집어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P381
이렇게 해석되는 말이었다. 누군가를 다시 만나고자 롤라에 왔으나, 누군가가 오히려 고통이 되었다. 해석이 맞다면, 그도 나처럼 누군가를 가뒀을 것이다. 대신 시끄럽지만 감정을 견딜 만한 공달과 살아왔을 테고. 내가 매번 제이 대신 여우를 불러내는 것처럼. 억겁을살아도, 모든 것이 가능한 천국에서 살아간다 해도 인간은 달라지지않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안의 고통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감정적 존재였다.- P388
"해상 씨가 내 미래를 설계하면 그게 곧 내 운명이 됩니다. 내겐 해상씨가 신이나 다름없는 거고요. 그렇죠?"
완전히 옳은 답은 아니었다. 그의 미래는 그의 과거가 만들어내는그림이었다. 단지 내 손을 통해 그려질 뿐. 나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쪽 세상에서 살 때 나는 내가 누군지 안다고 생각했어요. 사는게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살다 보면 나아질 거라 믿었고, 결국- P389
그런 믿음은 허상이었어요. 내가 왜 사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된거죠.
"살아 있는 동안 자기 삶을 이해할 사람이 있을까요."
내가 되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영원히 살고 싶어서 롤라에 온 게 아닙니다. 그저 도망친 겁니다. 그것도 아주 성급하게. 이곳에 와서야 궁금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때 도망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내 삶을이해할 수 있었을까. 적어도 이해할 만한 실마리라도 찾지 않았을까"
그 이해가 왜 그리 중요한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생명체는우연에 의해 태어난다. 우연하게 관계를 맺고 우연 속에서 살다가 죽는다. 인과관계가 명확하게 정의되는 삶은 롤라 극장에나 존재할 것이다.
"내겐 운명의 설계 없이 살아볼 기회가 필요해요. 도망치지 않는다면, 견뎌낼 수 있다면 내가 그 세상에 존재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아서."- P390
"롤라 극장의 원칙 말이에요. 일단 들어가면 선택한 생애가 끝나야나올 수 있어요. 롤라 극장을 기반으로 하는 드림시어터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원칙이에요. 반드시 죽어야만 끝이 나요. 죽지 않으면 몰라로 돌아오지 못해요. 가상의 세계를 유령처럼 영원히 떠돌게 된다는얘기예요."
"그게 왜 문제가 됩니까?"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죽으면 되잖습니까."
나는 초등학생한테 니체를 강의하는 심정으로 다시 설명했다.
"죽으려면 죽음에 이르는 길이 설계돼야 해요. 어느 날 갑자기 벼락을 맞아 죽는다고 해도 최소한 벼락 맞을 장소와 시점까지는 설계돼야 한다고요. 삶 전체가 죽음과 연결돼 있다는 뜻이에요. 태어나는 것 자체가 죽음을 향한 여정이라는 의미고. 드림시어터 안의 사람들이 설계된 운명을 사는 이유예요. 죽음이라는 보장된 출구가 있고 롤라로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으니까. 그런데 경주 씨는 백지를 원하고 있잖아요."
"스스로 죽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백지의 의미를 잘 생각해봐요. 무작위와 무한정의 시공간에 스스로 죽는다는 표지를 명확히 세울 수 있겠는지. 로토에 맞으면 나는 부자가 될 거야,라는 가정법과 비슷해요. 로토가 나를 피해 딴 사람에게만 간다는 점에서."
"방법이 없습니까?"
나를 보는 그의 눈에 이해와 답답함과 간절함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나는 머뭇대지 않고 대답했다.- P392
생생하게 기억하는 능력은 어떤 이에겐 저주가 된다. 그런 사람들은 세월이 주는 축복, 기억을 추억으로 바꾸는 도색 작업이 불가능하다. 당시의 상황과 감정까지 기록물처럼 고스란히 남아 있다. 기억을 되짚는 일은 그 일을 다시 겪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노트 작업은 내게 바로 그런 일이었다.
기억은 예상보다 섬세한 극화물로 압축돼 있었다. 이를 푸는 일은각오한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 망설이고, 회피하고, 미루면서한 세월을 보냈다. 결국 만경빌리지에 입주한 후에야 첫 문단을 썼다.
"전화벨이 울고 있었다. 나는 눈을 떴으나 전화를 받을 수가 없었다......"- P409
그녀가 내민 잔에 커피를 채워주고 고개를 들었다. 순간, 그녀의 눈에 걸려들었다. 아니, 그 순간에 갇혔다. 그녀가 일순 낯설어지는 사술에 빠졌다. 비스듬하게 비쳐든 아침 햇빛이 그녀의 속눈썹에 가닥가닥 걸려 있었다. 검고 깊은 눈동자 안에서는 햇살이 은빛으로 산란했다. 두 뺨이 개울가에 내려앉은 첫눈 같았다. 귓불 아래로 돋아난솜털들이 포실포실 고개를 든 눈꽃 같았다. 나는 손을 뻗어 쓸어보고싶은 돌연한 충동을 느꼈다. 그녀의 코끝이 장미 봉오리처럼 빨개지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리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재채기를 터트리기 전에 나는 시선을 비켰다. 베란다로 날아든 까마귀 한 쌍의 움직임에 눈을 붙박았다. 실제로 보고 있는 것은조금 전 나를 가둔 ‘그 순간‘이었다. 귓속에서 맥박이 쿵쿵거렸다. 모세혈관들이 일제히 팽창하는 것처럼 온몸이 따끔따끔했다. 뱃가죽이긴장으로 팽팽해졌다. 그녀가 여자로서 내 안에 들어온 첫 순간이었다. 지금도 그녀는 내게, 코가 빨개진 채 아침 햇살 속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기억돼 있다.- P456
"선배가 제일 좋아하는 말 나왔다. 그냥 "
"내가?"
"입버릇처럼 쓰잖아. 그냥, 그냥 해요, 그냥 놔둬요, 그냥 일이 좀 있어요."
나는 그냥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이라는 말을 그냥 쓰지도 않는다. 난처하거나 당황할 때 튀어나오는 말이었다. 바꿔 말하면 그녀의 말과 행동, 그 밖의 모든 것에 난처했거나 당황했다는 얘기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라 인식할 만큼 자주.- P4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