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맨
한빈 2023/03/07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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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립 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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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0) - 2009-10-15
: 7,262
기억도 닳는다. 언제까지고 같은 분위기 같은 향을 간직한 채로 나타나지 않는다. 누구나 아름다운 순간이 영속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보물처럼 빛나던 것들은 하나 둘 뒤로 물러나고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새 하나만을 남겨둔 자신이 있다. 유리알처럼 다양한 색채로 가지를 뻗어가던 그의 삶은 하나의 곧은 선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 끝에는 죽음이 있다. 이제 그의 삶은 죽음 아래 통일된다. 자신보다 먼저 눈 뜬 이들이 눈을 감고 자기 옆에 같이 달리던 이들도 이내 멈춰서기 시작한다. 사람은 혼자 닳지 않는다. 그가 닳아감에 따라 그를 둘러싼 세계도 같이 닳아간다. 그가 머물던 곳은 파헤쳐지고 그가 관계한 이들은 떠나간다. 어디를 봐도 항상 같은 맛이 난다. 그는 이미 선을 넘었다. 이제 더는 전과 같아질 수 없다.
에브리맨, 그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사람이다. 넘치지 않고 모자르지도 않다. 제법 성공한 데다 충분히 사랑하고 너무 이르게 죽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초인이 아니다. 결혼생활은 세 번이나 파탄났고 그는 무결한 사람으로 남지도 못했으며, 그 자신이 만족할 만큼 살지도 못했다. 그의 몸은 늘 병들어 있었고 그는 항상 실체없는 죽음, 오직 징후로만 나타는 죽음에 시달려야 했다. 처음에는 육체다. 육체가 충분히 병들고 난 이후에는 삶이다. 죽음은 곧 그의 삶을 병들게 한다. 이제 기억도 그의 편이 아니다. 병 걸리고 낡은 이가 떠올리는 기억은 그를 더 닳게 만든다. 무엇이 그의 삶을 병들게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필립 로스가 재현해낸 <에브리맨>의 장면들은 알아보기 어려운 순서로 배열되어 있어 그가 마침내 스러져야 했던, 기우뚱 거리기 시작한 지점을 특정할 수가 없다. 따지자면 모든 것이다. 그를 삶으로 이끌어온 모든 것들이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필립 로스는 '죽음'을 테마로 하나의 삶을 재현한다. 하지만 죽음은 항상 징후로 나타난다. 향도 없고 무게도 없다. 그것은 맞닥뜨리기 전까지 결코 오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죽음은 필연적으로 삶 속에서 자신의 징후를 드러낸다. 죽음은 삶을 통해 조형되는 것이다. 형체 없는 징후와의 대면은 그의 삶을 그 혼자만의 것으로 만든다. 그는 그것에 어떻게 대항해야 할지 모른다. 그의 삶을 이제 현실을 벗어나 형이상학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필립 로스는 그 죽음을 '형체 없는 죽음'을 현실로 끌어내린다. 에브리맨은 무덤가에서 무덤 파는 남자를 통해 죽음이 어떻게 다루어지는지를 보고, 듣는다. 죽음이 어떻게 예우되는지를 본다. 이제 죽음은 현실이다. 두려움은 미지에서 온다. 그는 이제 자신이 어떻게 될 지를 안다.
필립 로스의 문체가 인상적이다. 건조한 문체로 쌓아올린 삶은 다른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의 인물들이 뱉어내는 말들은 그 자신들과 너무나 가까이 밀착되어 있어 그들이 달리 말했을 가능성, 다르게 행동할 가능성을 상상해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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