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메모
  • 화이트 노이즈
  • 돈 드릴로
  • 16,200원 (10%900)
  • 2022-11-10
  • : 515
시간은 속인다. 모든 걸 해결해줄 것인 양 군다. 사람들은 속는다. 어떤 문제들은 일찍이 종결된 문제처럼, 조금은 고리타분한 문제처럼 취급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고 그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와 있다. 오래된 문제들을 향한 시선이 매섭다. 자신의 이슈를 전면에 내세우고 싶은 이들은 고전적 이슈에 냉소를 보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가치가 실제로 훼손되거나 해체되지는 않는다. 원형적인 문제들은 위대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역사 밖에 자리한다.

죽음, 자유, 무의미, 흔히 실존적 문제라 칭해지는 이들이다. 그들은 인간 삶의 조건이자 그 한계를 규정짓는 이들이다. 그들은 인간 삶에 일종의 형태를 부여한다. 이들을 인식하는 순간 선명했던 것들이 흐릿해진다. 카뮈가 말했듯 ‘문득 무대장치가 붕괴되는 일이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가 이 시간을 메고 가야할 때가 오게 마련이다’. 일단 한번 자신이 ‘시간 위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나면 모든 것이 불확실해진다. 자신의 육체가 언제 어떻게 무너질 지 알 수없다. 믿음과 기대 그리고 신뢰는 언제나 배신당할 위험이 있다. 그들은 이제 ‘사람의 일은 언제나 잘못될 수 있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한다. 불행히도, 죽음과 같은 것은 여태 단 한번도 극복된 적이 없는 것이어서 어떤 모습으로 내게 얼굴을 들이밀지 예측할 수가 없다. 시대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든 사람은 언제까지나 취약한 존재라는 말이다.

<화이트 노이즈>는 어떻게 보면 취약함에 대한 이야기다. 여느 훌륭한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화이트 노이즈>는 자기주장이 강한 편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모호하고 복잡하다. 은유는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다. 그저 암시할 뿐이다. 예컨대 소음이다. ‘균일한 화이트 노이즈’. 그것은 정신을 흐린다. 자기 것조차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한다. 자신이 말하고 느꼈던 것들에 대해 말할 권리를 위임하고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인다. 무엇이 내것이고 무엇이 내것이 아닌지 분간할 수 없다. 그곳에서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 한편으로 소음은 위안이 된다. 누구나 연약한 면을 가지고 있다. 그것에 눈 돌리기 위해 몰두할 것을 필사적으로 찾아낸다. 하지만 찾아내지 못해도 괜찮다. 세상에는 공포를 흐리게 할 만한 소음들로 가득 들어차 있으니까.

모든 것이 연결되고 교차된 오늘 <화이트 노이즈>는 의미가 깊다. 물리적으로 접촉하지 않아도 전염되는, 파동과 반사를 통해 사람에서게서 사람에게로 향하는 일종의 정신감응. 꽤나 가깝게 들리는 이야기다. <화이트 노이즈>가 얼마나 당대의 미국 사회를 현실감 있게 반영하고, 그것이 또 우리 사회와 얼마나 유사한지 대조하고 투영하는 작업도 꽤나 흥미로울 것이다. 하지만 그런 렌즈로 작품을 보고 싶지는 않다. 거대서사와 총체성을 거부하면서 시대적 렌즈를 통해 작품을 읽는 것은 멋없는 일이다. <화이트 노이즈>는 현실의 나열이나 재현 혹은 재배치가 아니다. 그것은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새롭게 인식된 하나의 상이다. <화이트 노이즈>는 시종일관 인식의 문제를 거론한다. 실제 감각하는 것과 허공에 부유하는 정보를 수신하는 것이 더는 구별되지 않는 세상이다. 중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구분되지 않는 세상이다. 그 뒤에서 무엇을 읽어낼 지는 독자의 몫이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