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여고 동창과 전화 통화를 끝낸 후,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나는 책장 깊숙이 감춰진 20년 전의 여고시절 졸업앨범을 펼쳐 보았다. 나는 불안하다. 예전의 기억이 부분적으로 삭제되거나, 꿈과 섞여 새롭게 재탄생 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며칠 전의 일이다. 뭔가 적으려고 볼펜을 찾는데, 필통이 보이질 않았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도서관 수업 후 책상에 놔두고 온 건 아닐까. 재깍 도서관에 전화를 했다.
“수요일 수업 후 책상 위에 놔두고 온 것 같아요. 색깔은 진남색이고요, '필 라'라고 분홍 글씨로 써 있어요. 하필 필기도구도 잔뜩 들어 있는 데 큰일이네요.”
잠시 후 전화벨이 울린다. 두근두근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전화를 받았다.
“책상 위, 아래 모두 찾아 봤는데 없네요.”
나는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울상이 됐다. 잠시 동안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간신히 추스르고 일어섰을 때,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잃어 버렸다고 신고한 필통이 식탁 위에 버젓이 있는 것이 아닌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더니, 꼭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만 같았다. 어쨌든 자신의 일처럼 열심히 찾았을 담당자에게 미안한 노릇이다. 기가 막히는 것은 필통이 왜 거기에 있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나의 이런 건망증은 이제 일상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가장 어이없었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신혼 때였다. S백화점에 쇼핑을 하러 갔었다. 임신을 해서인지 손가락이 꽤 부어 있었지만, 다이아 반지를 기어코 끼우고 갔다. 주말이어서 그런지 백화점은 꽤 붐볐다. 9층 스푼과 포크를 파는 매장이었는데, 아줌마들이 어찌나 극성인지 밀고, 당기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임신 7개월 임산부에 대한 배려는 어디에도 없었다. 우아하게 쇼핑하려던 나는 괜히 남편에게 투덜거리며 지하 식품 매장에서 장만 보고 서둘러 집으로 왔다. 옷을 갈아입고 막 손을 씻으려는 찰나, 내 눈을 의심했다. 손가락에 있어야 할 다이아 반지는 선명한 빨간 자국만 남긴 채 감쪽같이 없어진 것이다. 나는 혼잡한 백화점 9층 매장을 얼른 떠올렸다. 5인조 소매치기단이 내 다이아 반지를 노리고 혼잡한 틈을 타 반지를 빼갔다고 확신하고, S백화점 고객만족실로 부리나케 전화했다.
“오늘 백화점 9층 매장에서 제 다이아 반지를 소매치기 당했어요. 몇 백만 원 하는 건데요. 어떡해요.”
나는 거의 울다시피 전화를 끊었다.
“아니, 사람이 어떻게 반지를 빼가는 데도 모를 수가 있어.” 하며 남편은 언성을 높이며 눈에 핏발을 세웠다.
“글쎄 나도 몰라. 여기에 있어야 되는데 없잖아!”하며 울부짖었다.
차라리 반지를 끼우고 가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며 화장대 서랍을 거칠게 열어도 봤지만 그곳에 있을 리 만무했다.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다급한 목소리의 백화점 직원이었다.
“각 층의 CCTV를 모든 보안 요원이 샅샅이 검색해 봤지만, 소매치기하는 모 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화를 끊는 손이 심하게 떨려 눈앞이 어지러웠다. 태어나서 이렇게 큰 물건을 잃어버린 일은 처음이라 두렵기까지 했다. 남편은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당신 손가락은 무사하잖아. 예전에 들은 얘긴데, 등에 업힌 아이 손가락의 돌 반지를 빼내기 위해 손가락도 부러뜨리기도 했대.”라고 애써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위로를 해주었다.
비장한 각오로 장사를 지내듯이 다이아 반지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렸을 즈음, 다이아 반지는 입고 있던 나의 트레이닝 바지에서 거짓말처럼 발견되었다.
이렇듯 나의 건망증은 불안과 환희를 넘나드는 롤러코스터와 같은 것이다.
김수정. 여고 시절 그녀는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아서 걸을 때 절뚝거렸는데, 몸매가 가냘팠고, 키가 컸다. 그녀는 윤동주 시인과 얼굴이 닮았다는 이유로 고전문학 선생님을 유난히 좋아했고, 난 문제를 몰라도 절대 무안을 주지 않은 자상한 수학선생님을 좋아했다. 우린 만나면 교정의 장미꽃을 보면서도 할 말이 많은 둘도 없는 단짝 친구였다.
큰 아이가 네 살 되던 해 추석을 쇠러 시댁을 갔다가 우연히 광주 공항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때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았고, 서울 올라가서 몇 번의 연락을 했었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고 세상에 혼자 남아있다고 절망했을 때, 불현듯 그녀가 그리웠다. 어렵게 그녀의 연락처를 찾아 전화했는데, 조금은 어색할 줄 알았던 나의 걱정은 기우였다. 자식 이야기로 한참을 깔깔깔 웃으며 이야기 하다, 내가 먼저 여고시절 추억을 꺼냈다.
“수정아, 고3때 수학시간에 네가 뒤에서 쪽지 보냈잖아, 내가 수학선생님께 잘 보이려고 꼿꼿이 앉아 있어서 내 뒤통수만 보인다고.” 나는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가만있어 봐, 내가 생각하는 현정이가 누굴까?”
“……”
“아, 기억났다. 현정아, 너랑 대학 축제 때 맥주를 마셨는데, 네 얼굴이 빨개졌 다.”하며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녀와 다른 대학에 다녔을 뿐만 아니라, 맥주를 마셨다고 얼굴이 빨개지는 체질은 더욱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의 대학에 초대받아 갔을 수도 있고, 맥주를 많이 마셔 얼굴이 빨개졌을 수도 있겠지만 전혀 생소한 기억이다.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녀의 늦둥이 딸이 보채는 바람에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나는 갑자기 머릿속이 공황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 후로 그녀에게서 연락이 없다. 오랫동안 연락이 두절된 친구에게 갑자기 전화가 오면, 정수기 팔아 달라거나 보험 들어 달라는 경우가 흔히 있다고 한다. 나의 순수한 마음이 그녀에게 잘못 전달된 것만 같아 애석하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다이아 반지가 다시 돌아 왔던 것처럼 그녀와 나의 기억이 제자리를 찾아 가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