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주한 지도 벌써 반년이나 지났건만 전 재산을 투자해서 얻은 보금자리는 별로 매력적이지 못했다. 흔히 상투 잡는다고 했던가. 가장 비쌀 때 산 아파트 가격은 갈수록 하향곡선으로 치닫더니 좀처럼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파트 내부의 크고 작은 하자는 또 어찌나 많은 지 한동안 아파트 시공업체가 뻔질나게 제 집 드나들듯이 하지 않았던가. 하긴 그땐 나도 좀 진상을 떨었을 테지.
그런 내가 아파트 홍보대사를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서게 된 것은 7월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저녁 찬거리를 사들고 아파트 1층 현관문을 들어서려는데 좌측 광고판에 “○○아파트 홍보대사 모집”이라는 공고를 발견했다.
‘어? 입주민을 대상으로 일 년에 두세 번의 홍보대사 미션을 수행하면 얼마간의 수당을 지급한다고!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는데 한 번 해 볼까?’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마음 터놓고 모닝커피 한 잔 마시며 수다 떨 수 있는 이웃 한 명쯤 만들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이 별똥별 떨어지는 것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는지도 모른다.
드디어 첫 미션이 떨어졌다. 아파트 입주민 세 명에게 당 아파트에서 실시하는 서비스 내용과 우리 아파트 인터넷 카페와 이벤트 행사를 홍보한 후 몇 가지 주제에 대해 공유하면서 수다 떨기란다. ‘후후, 어쩜, 내가 바라던 일이잖아! 결과 보고서 쓰는 거야 뭐, 내 전문이니 식은 죽 먹기고, 서명은 모여서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스레 해 주겠지!’더욱이 교육이나, 여가에 대한 정보공유란 항목에 시선이 꽂히는 순간, 나는 이미 거실에 다과상을 차리고 이웃 엄마들과 호호, 하하 웃고 떠들고 있었다. 상상만 해도 내일 소풍가는 아이처럼 설렜다.
하지만 즐거운 상상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이른 아침부터 청소기를 돌리고 신문을 뒤적뒤적 하는데 불현듯 누군가와 커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싶었다. 내친 김에 홍보대사 미션도 할 작정이었다. 옆 동에 사는 둘째아이 같은 반 아이 엄마가 떠올랐다. 그녀와는 평소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지만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은 사이다.
그녀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봤지만 받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한 번 더 해 봤다. 역시나 안 받았다. 초조했다. 발신 번호 횟수는 어느덧 여섯 번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러다 스토커가 될 것 같아 포기했다. 이렇게 간담회를 열겠다는 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윽고 홍보지와 결과 보고서를 들고 나와 무작정 아파트를 돌기 시작했다. 여름의 더위가 가시기 시작한다는 처서가 지났건만 햇볕이 이글이글 거려서 뒷목이 따가웠다. 한참이나 아파트를 빙빙 돌아보았지만 벤치나 정자 그 어디에도 앉아서 쉬고 있는 사람은 안 보였다. 그때 저만치 사십대쯤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종종걸음으로 뒤쫓아 갔다. 또각또각 내 신발소리에 뒤돌아서 힐끔 보는데 막상 뭐부터 말해야 할 지 몰라 슬쩍 옆길로 피해버렸다.
서명 얻기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을 직감한 나는 일단 슈퍼로 뛰어가 캔 커피 4개와 쿠키 한 상자를 사들고 내가 사는 동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2층. 현관 앞에 우유 주머니가 매달려있다. 분명 아이 키우는 집일 테지. 초인종을 눌렀다. 인기척이 없었다.
3층. 초인종을 누르니 뜻밖에 큰 딸 친구가 나왔다. 나는 상냥하게 말을 건냈다.
“엄마 계시니?”
“아뇨. 직장 가셔서 저녁 늦게 오세요.”
“언제 오시는데?”
“회식 있어서 아주 늦게 오신댔어요.”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친 것처럼 아쉬웠다. 들고 있던 과자나 몇 개 쥐어 주자 문이 닫힌다.
5층. 떨리는 마음으로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하는데 나이 지긋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저 14층에 사는데요. 저… 홍보대사, 저… 문 좀 여 열어주세요.”
나도 몰래 말을 더듬더듬 거렸다. 뒤돌아서 그냥 가려는데 문이 스르륵 열린다. 얼른 캔 커피를 건네며 이야기했다. 서명을 부탁하니 흔쾌히 해 주었다. 몇 차례 실패한 끝에 두 집의 서명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결과 보고서를 쓰려니 괜스레 마음이 울적해졌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긴 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어째 허전하고 씁쓸했다.
하지만 아파트 홍보대사 아르바이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시다 만 캔 커피의 맛이 달콤해 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