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석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 그날 밤, 규홍의 방안 풍경은 잘려 나간 달수의 손가락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에 창애의 비명소리까지 더해져 괴기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규홍은 입술이 새파랗게 된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창애를 뒤로하고 축 처진 달수를 들쳐 업고 방을 뛰쳐나간다.
창애는 차갑고 축축한 것이 스르륵 몸을 기어오르는 것 같아 소스라치게 놀라 상체를 뒤틀면서 일어나 앉아본다. 분명 부엌에서 밥을 푼 것 같았는데 지금 방에 있는 자신이 혼란스러워 멍하니 벽을 응시해 본다. 멀쩡한 사람이 누가 지랄쟁이를 데리고 살아. 나 같으면 절대 결혼 안할 테야. 절·대 결혼 안할 테야…귓전을 파고드는 누군가의 외침이 창애는 뼈에 사무치도록 서럽다.
불러오는 배를 문지르며 창애는 가끔 당돌하게도 뱃속의 아이가 청년 삼인이 태권브이처럼 합체라도 하면 어떨까 제멋대로 상상해 본다. 진한 눈썹에 쌍꺼풀이 진 이글이글한 눈과 깍은 듯이 오뚝한 콧날의 소유자 준석의 외모에다 툭하면 울기나 하는 못난이 같지만 그녀의 작은 허물도 감싸줄 것 같은 달수의 부드러운 심성, 규홍의 탄탄한 재력과 세상을 시로 풀어내려는 정열을 머릿속에 그려 보며 창애는 희미한 미소를 짓는 것이다.
사건이 있던 날 이후 행려병자가 된 준석은 규홍의 임시 거처를 몰래 찾아 가 본다. 준석은 달수도 걱정이 되긴 했지만 창애 뱃속의 아기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준석은 대문 앞을 서성이며 한 쪽 팔은 목발에 의지한 채 한 손으로 연신 얼굴을 훔쳐 내며 지난날을 되돌아본다.
창애가 준석의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게 된 것은 몇 달 전이었다.
그즈음 창애가 발작하는 일은 잦았는데, 대책이 없이 방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횟수가 늘면서 그녀의 모습은 눈에 띄게 변해 갔다. 꼭 창애의 몸속에 다른 사람이 들어 앉아 있는 것만 같아, 보는 사람의 간담을 철렁하게 하곤 했다. 창애의 총기 있던 까만 눈동자는 무언가에 홀린 듯 초점을 잃어 갔으며, 벽에 방처럼 붙은 규홍이 쓴 “혈서”라는 시를 보며 웃고 재잘거리던 그녀의 입술은 음식을 먹을 때를 제외하곤 좀처럼 움직이는 일이 없게 되었다. 주구장창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던 준석도 창애가 발작하는 순간만큼은 일어나 앉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창애의 몸과 접촉하는 일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다 준석은 우발적으로 창애를 덮치게 되었다. 연민은 사랑의 감정을 가져다 줬지만 준석이 처한 상황은 그를 더욱 비참한 구렁텅이로 내몰았던 것이다. 번번이 규홍을 창애의 배필로 못 박아 버리는 박 노인의 편지를 볼 때 마다 준석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어쩔 도리가 없어서 그렇게 달수에게 격하게 화풀이를 했던 것이다.
이제 혈서라도 쓰듯이 순간을 살아보고 싶었던 준석의 욕망은 기억 저편으로 물러나고, 대신 창애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만이 준석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그때, 아기 울음소리가 대문을 휘몰아친다. 집 안쪽의 움직임이 심상찮다.
준석은 본능적으로 절뚝거리며 뒷문으로 도망치듯 사라져 버린다.
하늘은 실연당한 여인의 눈빛처럼 흐리고, 황량한 들판 가운데 길게 난 언덕 위에는 상여가 지나간다. 먼 산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걷는 박 노인의 뒤를 달수가 “창애야, 창애야”를 부르짖으며 뒤 따라간다. 달수의 품에 안긴 핏덩이가 박 노인과 달수의 애끓는 슬픔을 대신해 처량하게 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