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한창남은 고등보통학교 1학년 학생으로 매 수업시간 마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는 매우 재치있고 반 아이들에게도 단연 인기있는 아이이다.
체조시간에 샤쓰(지금의 '내복'의 의미같다)를 입지 않은 자신의 몸을 '만년샤쓰'라고 한 대목을 보면 창남은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늘 재치로 대처하는 용기있는 아이여서 대견하면서도 마음 한켠이 저려온다.
뒷부분에 가서 나의 코끝을 빨개지게 하더니 기어코 가슴이 미어지도록 눈물나게 했던 대목은 엄동설한에 상의는 교복, 하의는 다 헤진 한복 바지에 짚신을 신고 온 창남의 모습, 아니 그보다는 그렇게 입고 오게 된 사정을 담담하게 전하는 창남의 이야기였다. 늘 강인한 모습을 보여 주었던 창남이가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린다. 나 또한 꾹 누르고 있던 울음이 복받친다.
그 이야기를 듣던 선생님은 애써 눈물을 참으려고 천장을 바라보시는데 눈과 코가 빨갛다. 제자의 아픔을 함께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에서 진정한 참 스승을 보았다.
창남의 어머니는 훌륭한 어머니이신 것 같다. 아무리 눈이 안보인다 해도 어찌 가난한 살림을 모르겠는가.
자신도 어렵지만 더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도우라고 하시는 어머니에게서 내 아이만 괜찮으면 되지, 늘 내 아이를 위해서 바쁘게만 살아왔던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창남을 이십리 먼길에 학교를 보내면서 아들을 삐뚤어지게 키우지 않고 올곧은 심성으로 자라게 한 것은 어머니의 안 보이는 손길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 책이 오늘날의 시대와 동떨어 진다하여 어른들을 위한 동화, 혹은 왜 이 책이 아이들 필독에 속하는가에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을 지 모르겠다.
어른이 먼저 읽어 내 아이만 잘되면 되지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모든 아이들이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야 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주위에 그런 아이들이 안 보인다하여 없은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먹고 살만하다 하여 모든 아이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 않은가?
T.V에서 보여지는 소년소녀 가장들이 있어서 그렇고, 문학작픔 속에서 알 수 있듯이 아직도 결식아동들이 우리 주위엔 많이 있다고 들었다. 얼마전 용산참사현장을 보더라도 하루 아침에 아버지를 잃고 슬퍼하는 아이들, 영문도 모르고 자신들의 보금자리가 헐리는 것을 그져 넋놓고 보고만 있어야 하는 아이들이 있기에 그렇다. 얼마전 못된 어른의 잘못으로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갈 나영이가 있어서 그렇다.
우리는 어쩌면 알고 있으면서 마음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애써 외면하고 사는 지도 모르겠다.
우리 아이들이 읽어야 한다. 어른도 부모도 물론 읽어야 한다. 아픔을 같이 느꼈으면 좋겠다.
우선 어려운 상황에서 얼굴에 슬픔이 가실 날이 없는 아이들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다.
아이들아, 힘들고 어렵겠지만 아무쪼록 이 책의 한창남과 같이 힘든 상황을 꿋꿋이 견디어 가길 바란다.
부디 어렵더라도 정말 힘들겠지만 '만년샤쓰' 표지의 한창남처럼 웃음 잃지 않고 살아가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