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책읽고 차한잔 좋죠

초등학교 1학년 입학하고  어느덧 2학기에 접어들어 그럭저럭 학교 생활에 적응하고 있던 

늦여름 어느 날이었다.  

평소처럼 피아노 학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우연히 우리 반 배사장을 만났다. 

하도 먹성이 좋고 배가 많이 튀어 나와서  담임 선생님께서 지어 준 별명이다. 

나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관계로 별명이 아직까지는 없다. 어디 예쁘고 깜찍한 별명 없을까?  

아, 나를 보더니 관심을 보이며 어디 가는지 물었다. 

집에 가는 길이랬더니 눈을 반짝이며 같이 가자고 한다. 

대답하기도 좀 그래서 끄덕이고 걸음을 옮기자 내 옆에 바짝 붙어 따라 온다. 

"우리 손잡고 갈까?" 배사장이 물었다. 

가만히 있었더니 내 손을 슬그머니 잡는다. 뭐 그리 나쁘진 않았다. 

집에 왔더니 엄마가 계셨다. 

배사장은 우리 반 소문난 말썽쟁이라 엄마가 순순히 들어 오라고 할 지 조금 걱정됐다. 

하지만 나의 우려와는 달리 "어유, 배사장님께서 어인 행차이신지요? 어서 들어 오너라" 

하고 반겼다. 

우선 요즈음 우리 반에서 가장 유행하고 있는 카드를 꺼냈다.  반 아이들이 수업시간까지  

카드에 정신팔려 있는 통에 결국  "카드 가져오면 빼앗음" 이라는 약간 유치한  항목이  

알림장에 단골 메뉴로 오르 내리기에 이르렀다.  카드를 놔 두고 다니니 그만큼 간절했었다.  

한참을 하고 있는데 엄마가 얼음 동동 띄운 음료수와 찐고구마를 내오셨다.  

배사장은 음료수만 두잔이나 먹었다. 몸에 좋은 것은 별로 안 좋아한다. 

이어 불루마블 게임을 하자고 했다. 배사장은 자기 집에도 있는 거라면서 알은체를 했다. 

게임하는 중에 나한테 돈 이만원 내라고 한다. 만원짜리 다 내서 없다고 했더니 "야, 오천원짜리  

네장 주면 되잖아!"하며 약간 무시하는 말투로 말했다. 

배사장은 수업시간에 속이 답답하다고 칠판 밑 교실바닥에 뒹굴뒹굴하기 일쑤다. 

그렇게 딴짓하다가도 신기하게도 수학 문제 정답은 척척 알아 맞힌다. 알 수 없는 애다. 

난 계산을 잘 못한다. 엄마는 내가 신기하단다. 넌 수업태도도 좋고 집에서 학습지도 하는데 

왜 그렇게 시험성적이 낮게 나오는 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배사장은 부모님이 직장에 나가셔서 밤 10시경에나 오신다고 한다. 방과 후에는 거의 학교 

운동장이 자기집 앞마당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는데도 받아쓰기는 항상 80점이상 나온다. 심지어 담임선생님께서 불시에 본 시험에서  

난 20점 맞았는데 배사장은 100점을 맞았다. 

그때 얄밉게도 공부 하나도 안했는데 100점 맞았다고 얼마나 뻐기던지.  

아마 그때부터 우리 엄마가 배사장을 보는 눈이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욱하는 성질하고 똥고집만 좀 고치면 노는 것이 제법 창의적이라며 호기심을 가지고 말씀한  

기억이 난다. 

아마 오늘 깜짝 방문에도 순순히 응한 것을 보면 아마 친하게 지내면 창의적으로 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내심 했는 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기분이 좀 상하긴 했지만  꾹 참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노래방 장난감이 생각이 났다. 

90점이 넘으면 팡파레가 울리는 장남감이다. 마이크도 있다. 

제일 자신있는 "검은 고양이 네로"를 불렀다. 평소에는 그렇게 불러도 90점을 못 넘겨 

애를 태웠는데 헉, 92점이 나왔다. 배사장 눈이 커졌다. 내친 김에 "아빠와 크레파스"도  

불렀는데 94점이었다. 흐흐. 학교 시험성적은 70점을 못 넘겨 허덕이던 내가 90점을 넘었다. 

엄마도 "아휴~ 우리 딸 남자 친구 앞이라고 가수 뺨치게 부르는 구나"하고 거들었다. 

웃긴건 배사장에게 불러 보라고 떠밀었지만 괜히 책장의 만화책만 꺼냈다 뺐다 한다. 

한마디 했다. "너 노래 못 불러?" "응" 아까 블루마블했을 때 속상한 마음이 조금 풀렸다.  

그러다 재미없어 졌는 지 밖에서 놀자고 했다. 축구공하고 줄넘기를 가지고 나갔다. 

뻥뻥 공을 차대는 통에 내 얼굴에 맞을 뻔 했다. 같이 차야 하는데 혼자서만 몰고 갔다. 

나한테 오는 가 싶으면 어느 틈에 달려와서 뻥 차버렸다. 

공을 뺏으면 안 줄려고 마음 먹었다. 드디어 내가 공을 잡았다. 꽉 잡고 안 놔 줬다.  

주라고 막 사납게 굴었다. 그럴수록  더욱 꽉 잡았다. 그랬더니 뒤에서 팔을 감아 목을 졸라맸다.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다. 엉엉 울어도 안 놔줬다. 무서웠다. 옆에 있는 아저씨가 뜯어 말려서 겨우  

놔 줬다.   

'야, 배사장! 성질 진짜 드럽다! 너랑 다시는 안 놀아. 너 우리집에 한 번만 오기만 해봐라!'하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혹시 오늘 일기장에 이렇게 쓸 지 모르겠다. 하윤이 집에 놀러 갔는데 치사하게 자기 공이라고  

안 줘서 화났다고.  

배사장은 자기가 잘못한 일은 싸악 빼고 속상하고 기분 나쁜 것만 쓸 것이다. 

나는 다 안다. 배사장은 무조건 불리하면 자기한테 유리한 쪽으로 말하는 재주가 있으니까.

나쁜 녀석. 바보 똥개 멍청이!  

엄마에게 당장 달려가서 울먹이면서 일러 바쳤다. 

엄마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자애들은 원래 그렇게 과격하게 노는 거야"라고 울고 있는  

나를 나무랐다. 

난 죽음에 문턱에 다녀온 것 같았는데 말이다. 

그러면서도 "배사장은 여자를 잘 모르는 구나, 쯧쯧,언제나 철이 들까나" 하며 덧붙였다.  

그래,  배사장! 너같은 애 한 트럭을 싣고 와 봐라, 내가 눈하나 깜빡하나.   

"하윤아, 친구 배웅해야지, 어서 나가 봐." 라고 엄마가 말씀하셨지만 나가지 않을 거다. 

집에 가든지 말든지 상관할 바가 아니지. 

엄마는 언니랑 도서관에 다녀 온다고 나가셨다. 나가다가 배사장 만나면  나 울렸다고 

혼내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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