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창업에 가장 큰 공을 세우고도 역적으로 몰려 역사의 그늘에 머물러야 했던 정도전.
그의 일대기를 되집어 본 책이다. 이름 뿐인 새 왕조 창업이 아닌 진정으로 혁명을 꿈꾸었으나 시대에 부조리함에 기생하고 있던 무리와 명나라가 발흥하면서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고려사 신돈 열전과 조선경국전에서 고려 말의 상황이 잘 나타난다.
“토지제도가 파괴된 후부터는 호족이 겸병하여 부자는 땅이 더욱 불어나고 가난한 자는 송곳 꽂을 땅도 없다. 가난한 자는 부자의 토지를 빌려 경작하고 일 년 내내 고생해도 먹을 것도 부족할 지경인데, 부자는 편안히 앉아 소작인을 부려 그 수입의 태반을 먹는다. 국가는 아무 대책 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 그 세를 받지 못한다. 따라서 백성은 더욱 고생하고 국가는 더욱 가난해진다.”
<조선경국전>
“권세 있는 신하와 명문대가들은 친당이 뿌리처럼 이어져 있어 서로 허물을 가려주고, 초야에 묻혀 있던 신진은 감정을 감추고 행동을 꾸며 명망을 탐하다가 귀한 신분이 되면 집안이 한미한 것을 부끄렇게 여기고 명문거족과 혼인하여 처음의 뜻을 버리며, 선비들은 유약하여 강직함이 적고, 또 문생이니 좌주니 동년이니 칭하면서 당을 만들고 사사로운 정을 따라 이르니 이 세 부류는 모두 쓰지 못하겠다. 세상을 떠나 초연한 사람을 얻어 크게 써서, 머뭇거리며 고치지 않는 폐단을 개혁하려고 생각했다.” <고려사><열전 신돈>
이런 혼란스런 세상에서 나라를 바로잡을 수 있는 군자의 정치를 꿈꾸었다. 도덕과 정치의 일치, 즉 도덕적 세력의 정치 참여와 권력 장악에서 찾았다. 고려의 문을 닫고 조선을 창업하면서 개혁 방침은 크게 세 가지 였다.
첫 번째. 재상중심 정치
두 번째. 토지 개혁
세 번째. 만주 수복
세습 군주제의 단점은 왕의 자질이 일정치 않다는 것이다. 총명한 왕이 나오면 좋은 일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으므로 철학이 뚜렷한 실력뿐만 아니라 도덕성 까지 갖춘 지식인들을 바탕으로한 재상중심 정치를 꿈꾸었다. 하지만 총명하고 정도전과 마찬가지고 문무를 겸비하고 조선 창업에 큰 역할을 했던 야심만만한 이방원에게는 눈에 거슬렸고 결국 그의 손에 정도전이 꿈꾸었던 개혁은 멈추고 말았다. 원래 정몽주에게 죽을 목숨을 이방원이 한 번 구해주었으니 이는 어떤 뜻인지...
토지 개혁은 전국의 토지를 국가 소유로 하고 모든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해 자영농의 나라를 꿈꾸었지만 수 많은 토지를 겸병하고 있던 권문 세족들의 반대로 일부분 밖에 성과를 내지 못했다. 정도전이나 조준 같은 역성혁명파는 급진적인 사회 개혁을 원했지만 지주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던 온건보수파 사대부들은 점진적인 개혁을 원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토지개혁을 이루지 못했고 이방원이 집권한 후 정권을 잡은 온건보수파는 훈구파로 불리며 고려말 귀족 처럼 되어갔다. 결국 향촌 출신의 사림의 비난을 받았는데 정몽주와 길재같은 조선왕조를 거부하고 토지개혁에서 적극적이지 않았던 온건보수파를 신봉했다니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조선왕조와 비슷한 시기에 나라를 세운 주원장역시 왕조 초반이었기 때문에 나라 정비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조선의 정도전의 만주를 수복하겠다고 대놓고 나오니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나라를 세운 인물이니 그의 정치력은 이미 절정이었다. 혼란스러운 고려 말, 조선 초에 끊임없이 조선을 압박하면서 조선 내의 이방원과 정도전의 대립까지 이용할 정도로 능수능란했고 결국 정도전은 만주 수복에 실패했다.
조선 내적으로는 부패한 나라에 기생하던 지주계급의 권문세족들과 왕족들의 견제, 외적으로는 명나라의 주원장이라는 강력한 인물때문에 그가 꿈꾸었던 진정한 개혁은 실패했다. 나라가 부패하면 할 수록 구시대적인 암적 존재들의 힘은 강력했다. 많은 친원파 세력과 반조선 인물을 숙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을 위한 개혁을 하려고 하면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계속 발목을 잡는 사대부들을 보며 정도전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왕아래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고는 하나 답답했을 마음이 절로 전해져왔다. 기댈곳하나 없이 나라를 세우고 황제가 된 주원장이 의식할 정도로 정도전은 뛰어난 인물이었기에 집요하게 정도전을 물고 늘어졌고 안밖으로는 이들과 싸우랴..조선의 통치 구조를 세우랴 바빴던 정도전은 결국 에너지가 고갈되어버렸다.
이방원 관계의 관계에서 정도전이 왕이 아들이었고, 이방원이 신하의 입장이었다면 어땠을까? 당연히 둘의 입장은 바뀌었을 것이다. 왕이고 재상이고 이름일 뿐이다. 자기 입장에서 판단할 뿐이다. 그리고 둘은 모두 각자 문무를 겸비하고 자신 만만하고, 결단력 있으며, 권력지향적인 성향이 비슷해서 조화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어찌보면 정도전은 재상감이라기보다는 왕의 기운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왕자였다면 이방원 저리가라 할 정도로 왕권 중심주의 정치를 했을수도 있다. 자기 능력이 뛰어난데 굳이 재상을 둘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ㅎㅎ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했다고 말했을 정도이니 최고가 되고 싶은 욕망을 재상 위주의 정치로 풀어낸 것일까? 미완의 혁명이었지만 그가 기틀을 만들어 놓은대로 조선은 그 모습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