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 루이스의 인생역정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를 읽고
1.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
저는 일반적인 호러영화나 책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브래드 피트와 톰 크루즈가 주연한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는
꽤 여러번 보았습니다. 그저 잔인하고 충격적인 장면을 연속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주인공이 인간이 아님에도 인간인 독자가 공감하고 호기심을
느낄 수 있는 여러 감정적 요소들과 고민, 인간관계, 인생역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앤 라이스의 원작을 접하게 되어 많은 기대를 안고 책을 읽었습니다만
전혀 기대에 부족하지 않은 작품입니다.
영화를 볼 때 무심코, 혹은 크게 감정적인 공감 없이 휙휙 지나갔던 장면들조차
책을 읽은 후에 다시 보았을 때는 훨씬 다른 깊이와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또 한가지는, 예전에 이 영화를 볼 때는 못 느꼈는데 미국영화 특유의 유머감각이
스며 있더군요. 마지막 장면에 레스타트가 루이스의 인터뷰 녹음 테이프를 듣고
'아직까지 징징거리고 있구나' 하는 대사 같은 것 말입니다. ^^;;
이 영화를 재밌게 보신 분이라면 꼭 이 책을 접하시도록 권하고 싶습니다.
그저 얄팍한 흥미 위주의 선정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톤다운된 색깔같은
관조적인 관점에서 우리의 삶을 투영하며 생각해볼만한 이야기들이 펼쳐지지만
흥미진진한 모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2. 인상깊었던 부분
(1) 뱀파이어도 사랑을 한다?
무엇보다도 인상깊었던 부분은 바베트를 향한 루이스의 호감과 사랑이었습니다.
바베트는 이웃농장주의 딸인데요, 하나밖에 없는 남자형제가 일찍 죽는 바람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질 위기에서 루이스가 멀찍이 서서 준 충고를 듣고
많은 불리한 점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씩씩하게 농장을 이끌어가게 됩니다.
루이스는 그녀가 농장주가 되기 전부터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관찰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감지하고 도와줍니다. 이 부분에서 뭐랄까요,
그저 단순히 사람을 죽이고 피를 빠는 흡혈귀가 아닌,
따뜻한 마음과 아름다움, 지혜에 대한 동경이 남아 있는 루이스를 보면서
독자로서 기분이 좋았던 듯 싶습니다. ^^
그런데 이 사랑은 바베트가 루이스의 정체를 알게 되자 거부감과 혐오감을
느끼면서 비참한 종말을 맞습니다. 사람 대신 동물을 죽여 연명하고,
인간성을 유지하며 살아가려 했던 루이스는 자신이 순수하게 돕고 보호하려 했던
여성이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불붙은 램프까지 자신에게 집어던지는 것을 보고
많은 고통을 느낍니다.
물론 뱀파이어든 사람이든, 내가 호감간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다 사랑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의 도움이 다르게, 혹은 나쁘게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오해와 선입견으로 피해를 받을 수도 있고요.
이 책을 보면 이렇게 인간관계에 대입해 볼 수 있는 부분이 많이 나옵니다.
뱀파이어라는 특성상 인간과 다른 많은 점이 있지만, 결국은 루이스도 한 때
인간이었고, 뱀파이어 중에서도 가장 인간성을 유지하려는 감성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거부감보다는 동정과 공감을 불러오는 것 같습니다.
(2) 나는 누구인가, 뱀파이어도 하는 질문
또 다른 부분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입니다.
나는 과연 악마이고 어둠의 자식인가, 내가 속한 세상, 계층은 어떤 것인가.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세계의 종말을 보게 될까? 나와 같은
종족은 어디 있는가.
그 질문의 단어들만 바뀔 뿐이지, 이 질문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신에게
던지게 되는 질문이며 오래된 화두입니다.
루이스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물론, 나중에 레스타트와 루이스의
수양딸격으로 같이 살게 된 클라우디아는 중유럽으로 가서 같은 종족을
찾자고 루이스를 설득합니다.
그런데 거기는 말하자면, 인간의 선조격인 원숭이, 즉 이들 문명화된
뱀파이어들과는 전혀 다른 동물적인 생존본능만 남아있는 뱀파이어들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루이스의 출신국인 프랑스의 파리로 향하게 되죠.
(3) 가족의 상실, 그 고통
그 다음 제가 아주 인상깊에 보았던 부분은 역시 인간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어린 딸을 잃고 딸을 닮은 인형을 수없이 만들어내는 여인과
어릴 적 엄마를 잃은 클라우디아는 서로에게 의지하게 되고,
클라우디아는 루이스에게 그녀를 뱀파이어로 만들어 자신의 엄마가
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종용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작가인 앤 라이스가 딸을 잃었다는 사실이 새삼 떠오르면서,
물론 다른 주인공들도 그녀의 단면들을 반영하고 있을 수 있지만
작가가 조연으로 출연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 그런 면에서 보자면 두 젊은 뱀파이어가 클라우디아를 입양하여
인형을 사주고, 옷을 맞춰주고, 온갖 아름답고 사치스러운 것은
다 사주고 돌봐주는 것은 보면서 작가가 딸이 죽기전에 해주지 못한
돌봄과 사랑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애잔한 느낌이 들더군요. :)
(4) 뱀파이어 레스타트는 남자 심청?
매력과 자신감, 허영심과 자만심을 동시에 갖춘 뱀파이어 레스타트는
농장주이자 몽상가였던 루이스를 경제적인 이유로 뱀파이어로 만든 인물인데요,
이 인물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루이스가 묘사했듯이 레스타트는 감정도 양심도 없는, 철저하게 이기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저 단순히 그것이 레스타트라는 인물을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라는 말들을 하잖습니까? ^^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레스타트에게는 돌봐야 할 눈먼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레스타트가 남자 심청이라는 것이 잘 상상이 가지 않으시겠지만,
그는 가끔 속상해하고 욕도 하며 비뚤어진 태도를 보여주지만
끝까지 아버지를 최대한 잘 모시려고 애씁니다.
또 그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면서 레스타트에게 미안하다, 내가 너를 비뚤어지게
만들었다는 뉘앙스의 말을 하죠. 레스타트는 사실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으로 선생님까지 찾아와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했는데,
그런 거 다 쓸데없다고 무시한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자신이 재능있고 잘하는 일이 주변 사정과 사람들에 의해서
좌절된 경험을 해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레스타트를 이해하고
관찰한다면 또 거기에서 인물 탐구의 재미와 공감을 느끼실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5) 뱀파이어도 죽는다
영화의 말미에서도 볼 수 있듯이, 레스타트는 육체적으로 쇠약해지고
정신적으로 몰락합니다. 제멋대로 다하며 부자로 살 수 있는 불멸의 존재가 왜?
루이스가 스승으로 삼고자 했던 아르망이 말했듯이,
또 많은 세대가 시대가 변하면서 느끼듯이,
나는 그대로인데 세상은 변합니다. 예전에 친구들과 즐겨가던 까페는 사라지고,
그 친구들 역시 뿔뿔이 흩어지며, 내가 좋아하던 스타일과 아티스트들은
어느새 구식이 됩니다.
내가 애써 적응한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들로 대체되며,
어느 순간 학습과 적응의 의욕이 한계를 맞이하기도 합니다.
내가 사랑하던 많은 가치들을 새로운 세대들은 전혀 인정하지 않으며 생각해보지도
않으려 하기도 하고, 그 속에서는 공감과 연결된 느낌보다는
외로움의 고통, 그로 인한 좌절이 끝도 없이 자라납니다.
레스타트는 그런 고통 속에서 정신적으로 죽어가고 있었고,
루이스는 어떻게 자신보다 멀쩡한 모습으로 균형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 궁금해합니다.
그 답이 있다면 저는, 루이스가 최대한 간직하려고 애쓴 인간성에 있다고 봅니다.
닫힌 세상은 언젠가는 종말을 맞이하게 마련입니다. 저는 인간성의 미덕 중의 하나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루이스가 세기가 바뀔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고, 고립하기보다는, 더 잘 적응하고
새로운 것을 비교적 쉽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3. 책을 읽고 나서
책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은, 과연 많은 사람들이 인터뷰를 진행한 젊은이처럼
이 이야기를 듣고 오히려 뱀파이어에 대한 동경과 호감, 심지어는 기회가 있다면
뱀파이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까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글쎄요, 책속에서 루이스가 레스타트에게 말하듯이, 저는 죄를 인정하지 않고,
악귀처럼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불멸을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불멸과 세상을 관찰하고 많은 것을 배울 기회만큼은 동경할 만한
부분인 것 같네요. :)
벌써부터 다음 책을 보고 싶어집니다. 작가 앤 라이스는 1972년 이 책을 완성하여
1977년에 출판기회를 얻게 되고, 2003년 '피의 성가' 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양의 뱀파이어 연대기를 집필합니다. 첫번째 책에 이런 깊이가 있다니
과연 그 후의 책들은 어떨런지.. 작가 앤 라이스의 역량에 기대를 걸어봅니다. ^^
[참고] 책 자체의 구성
뱀파이어, 하면 떠오르는 색깔은 검정색과 빨간색이 아닐까요?
예전에 우연히 번역본의 예전 디자인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보다 훨씬 세련된 모습을 갖고 있는 책입니다. 사이즈도 적당하고요.
페이퍼백을 떠올리게 하는 비교적 작은 사이즈, 만화책의 아름다운 일러스트, 양질의 종이까지 갖춘
소장가치 만점의 책입니다. ^^
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은, 독자들 중에는 옆으로 누워서 책을 보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책의 반쪽만 손에 잡고 제본부분에 힘이 많이 가해질 수가 있는데,
저도 누워서 책을 많이 보는 편이라 첫장이 나중에 똑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 부분은 조금 개선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
그 외에는 대만족입니다. ^^
글쎄요, 언젠가 더 많은 일러스트나 역사적인 배경, 흑백 사진, 작가 인터뷰 등이
추가된 특별판이 나온다면 독자로서 대환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