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월부터 시작한 그림책 수업에서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 이자벨 아르스노를 알게 됐다. 책들을 살펴보던 중 그녀가 리뷰동아리(리독)에서 예전에 소개 받았던 책의 삽화를 그렸다는 걸 알았다. 제목이 <진지하지 않은>이다. 무엇이 진지하지 않은지 읽어보기로 했다.
이 책은 주인공 조르주.P의 열일곱 살 겨울부터 열여덟 살 봄까지의 개인적인 역사이다.
소년은 책을 좋아하고 조용하며 소심하다. 그는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나 사랑 받지 못하고 주변의 또래 여자아이를 마음으로만 연모한다.
어느 날 조르주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오고(이 사랑도 외사랑이다) 읽었던 책 속 그림과 글이 그의 얼굴, 팔 등 몸으로 나타나는 증상이 생긴다.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어른도 아이도 아닌 중간자. 소년은 지금 그 혼란한 시간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
이 독특한 내용의 글은 캐나다 퀘벡출신의 작가 레몽 플랑트가 썼다. 그는 TV와 라디오 청소년 프로그램에 1,000편이 넘는 방송 대본을 썼으며, 동요 가사를 400곡 넘게 썼고, 소설도 40여 권 남겼다. 청소년을 위한 문학 강연과 글쓰기 교육에도 힘쓰다가 안타깝게도 2006년 59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알라딘 발췌-
일러스트는 이사벨 아르스노(Isabelle arsenault)다. 그녀도 캐나다 퀘벡출신이며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했다. 그녀의 그림은 그래픽 세계를 통해 표현된 선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흐름, 독특한 색감이 매력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출간된 작품으로 <제인 에어와 여우, 그리고 나> <내 동생 버지니아 울프> <콜레트가 새를 잃어버렸대!> <꿀벌의 노래> 등이 있다. 캐나다 연방총독상. 프랑스 거버너제너럴상, 볼로냐 라가치상 등 수많은 상을 수상했고,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올해의 베스트 일러스트 북으로 선정된 세계적인 작가다. -알라딘 참조-
낡은 소형 비행기 한 대가 귀 밑을 날고 있었다. 오래전에 비행사들이 안데스 산맥 너머까지 우편물을 날았다는 것과 비슷하게 생긴 작은 비행기였다.
메르모즈, 라고 조르주는 중얼거렸다.
자셍트에게 이런 당혹감을 털어놓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하지만 그녀는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것도 바로 앞 카운터에서. -본문 중에서-
아르스노는 지극히 제한된 색으로 인물만 그리고 주변 배경은 과감하게 생략한다. 글속 캐릭터를 살린 그림으로 외부의 원인(자셍트와 남자)으로 생긴 조르주의 마음을 보여주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갖고 독자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려고 시도한다. 그래서 읽는 사람이 소년의 심리 상태에 더욱 공감할 수 있게 만든다.
얼굴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중략-
‘메리 크리스마스’를 듣지 않으려고 속으로 흥얼거렸던 슈베르트의 <야상곡> 악보였다. 그러더니 노래 가사가 나타났다. 리샤르 데지르뎅의 시였다.
감시의 눈길 아래에서
이름 없는 길 위에서
사막 한 가운데에서
추위와 배고픔과 쇠사슬 속에서
압제에 저항하려
자신의 둥지를 다시 만든다.
더 따뜻하게 더 따뜻하게.
마음은 한 마리의 새. -본문 중에서-
일반적으로 책에서 세밀한 배경과 인물 묘사를 통해 사실화 같은 삽화를 그리기도 하지만, <진지하지 않은>에서 이자벨은 실사처럼 상세한 배경과 캐릭터를 선택하는 대신 매우 단순한 이미지와 텍스트를 통해 감동을 전달한다.
소년은 파피에papier(프랑스어 'papier'는 종이를 뜻한다)라는 성이 자신에게 꼭 맞는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종이와 무엇이든 그 위에 쓸 수 있는 살갗은 서로 기막히게 통하는 것이므로. -본문 중에서-
열일곱, 열여덟, 하얀 종이처럼 무언가를 쓸 수 있는 여지가 많은 나이다. 조르주는 여백을 채우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간다. 카페에서 먹기 싫은 소스를 먹으면서 열심히 사랑을 하고 책을 읽으면서 말이다.
완독후 처음의 의문에(무엇이 진지하지 않다는 걸까) 나름의 답을 찾았다. 제목인 <진지하지 않은>은 정말 ‘진지하지 않은’이 아니라 반대로 ‘진지하게’가 아닐까.
타이틀이 말하는 것은 소년이 아니라 그를 바라보는 주변이 아닐까 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청소년기를 거치고 있는 자녀가 있는 독자에게 읽기를 권하고 싶다. 그들이 얼마나 치열하고 진지하게 자기 앞을 헤쳐 나가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