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덮은 지 2주가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작품에 대한 감동과 작가에 대한 충격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책에 대한 정보는 물론 작가도 생전 처음 들어보는지라 아무런 기대나 배경지식없이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심지어 제목만 보고는 소설이 아니라 '기다림'에 대한 에세이나 자기계발서인 줄 알았으니.
『기다림』 이 내게 준 첫인상은 이랬다. 근래 보기 드물게 우아한 표지와 전미 도서상, 펜 포크너 문학상 수상에 퓰리처상 최종후보라는 각종 수상경력을 내세운 카피, 그리고 혹시나 이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표지 정면에 떡 하니 붙여놓은 전미도서상 수상 금딱지. 한 마디로 첫인상은 좀 오만해보였다. 특히 금딱지에 대한 반감은 이 책을 읽기도 전에 내게 약간의 편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어디 얼마나 대단한가 한 번 보자.' 는, 마치 싸움이라도 거는 듯한 심정으로 집어든 『기다림』 은 그만큼 불리한 핸디캡을 안은 채 전투를 시작한 셈이다. 적어도 나한테서만큼은.
하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첫 장부터 작가에게 패하고 말았다. 흔히 일반적인 소설의 레퍼토리가 그렇듯, 이 책도 초반에 구구절절한 상황설명으로 시작할거라 생각한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첫 장부터 대뜸 아무 설명없이 가장 극적인 부분을 뱉어낸다. 나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럴리가 없는데...'라는 고정관념과 실제와의 괴리에. 그저 작가의 의도대로 멍청하게 작품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부모의 뜻으로 원치않은 여자와 결혼한 남자 린. 린은 아내 수위가 싫어 고향도 버리고 도시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도시에서 새로운 여자를 만난다. 아내가 싫어도 잘못이 없기에, 잘못은 커녕 병든 부모님 수발 다 하고, 혼자 딸까지 키우는 조강지처를 버릴 마땅한 이유가 없기에 평생을 그냥 그렇게 떨어져서 살리라 다짐했던 린은 새로 만난 우만나 때문에 결국 이혼을 결심한다. 하지만 바보같은 이 남자. 이혼하기가 다이하드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죽는 것보다 더 어렵다. 부인의 거부로 해마다 이혼의 문턱에서 좌절을 맛보는 린. 그런 린을 무턱대고 기다리는 만나. 둘은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기다린다.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17년 동안이나. 둘의 아름다웠던 젊음이 모조리 시들어 썩어갈 때쯤 드디어 린과 수위는 이혼했다. 린과 만나는 기다렸다는 듯, 아니 이 순간만을 기다렸기에 바로 결혼을 한다. 결혼만 하면 그동안의 고통이 모두 보상받을 줄 알았다. 그저 행복해질 줄만 알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몰랐던 것이다. 17년의 세월은 자각하지 못하는 동안에 아주 서서히 서서히 '사랑'이라 이름붙였던 알량한 감정을 퇴색시켜왔음을. 아마 알았더라 해도 어쩔 수 없었으리라. 무려 17년 동안을 하나의 목표만을 바라보며 인내하고 또 견뎌왔는데, 그 순간 그들이 어찌 다른 길을 택할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존재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결국 둘은 파국을 향해 치닫고 만다. 결혼은 이들이 생각한 이상향이 아니었다. 두 사람 다 평생토록 '결혼생활' 이라는 것을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더욱 더 서로를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는지도.
책을 덮고 나서 『기다림』 이란 제목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도대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기다림'이란 어떤 것일까? 이 책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주인공 남녀 쿵린과 우만나의 17년간의 기다림? 그렇다. 일견 보기에는 작품 전면에서 다루고 있는 이들의 기다림이, 제목에서 말하고자 한 바로 그 기다림이라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무시하려 해도 린의 아내, 수위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17년 동안 자신을 버리기 위해 노력한 남편에게 티끌만큼의 원망도 없는 아내. 원하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그녀. 새출발한 남편이 회한에 쩔어 찾아왔을 때에도 복수는 커녕 미소지으며 언제까지고 그저 기다리겠다고만 하는 그녀. 린이 딸에게 "엄마한테 가서 나 같은 인간 기다릴 필요 없다고 말해라.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니, 기다릴 가치조차 없다." 고 하자, 딸이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아빠. 우리는 언제까지라도 아빠를 기다릴거예요." 라고 대답한 마지막 대화가 자꾸만 떠오른다.
쿵린과 만나의 17년간의 기다림. 그들은 기다리는 동안 무척이나 힘들어했고, 또 본인들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감추려하지도 않았다. 기다리는 게 힘들다고 늘 투정부렸다. 그들에게 기다림은 고통일 뿐이었다. 그러나 또 한 여자. 수위의 기다림은 이들의 기다림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수위는 남편을 평생 말없이 기다렸지만, 기다린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그녀에겐 그저 숨쉬고 밥먹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당연한 일이니 힘들지도 않았다. 기다리는 것이 행복했다. 숨쉬고 밥먹는 것처럼. 이런 수위의 기다림 앞에 그들의 이기적인 기다림은 차게 식어갈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다이아몬드의 원석을 발견한 기분이다. 하진이라는 작가. 심상치가 않다. 처음부터 한껏 씹어줄 만반의 태세를 갖춘 내 마음을 단번에 무장해제 시켜버리다니. 아니, 무장해제로도 모자라 일주일 밤낮을 찬탄하게 만들다니, 분하다. 어쩐지 낚여버린 느낌이다. 분명히 분한데, 어느새 하진의 두번째 책 『광인』 을 주문하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 저게 나인가? 설마, 아닐거야. 시치미 떼려고 해도 문득 정신차려보면 시공사에 전화해 세번째 책은 언제 출간되냐고 묻고 있는 내 모습이 처량하다. 오호통제라. 된통 걸려버렸구나. 마지막으로 작가에게 한마디만 하겠다. "낚아줘서 고마워요. 하진씨. 나는 이제부터 당신의 작품을 기다릴거예요. 언제까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