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름 - 김홍도 (국립중앙박물관) ┃ 쌍검대무 - 신윤복 (간송미술관)
너무 감명깊이 읽은 책은 도저히 감상도 써지지 않는다는 걸 실감하고 있다. 『바람의 화원』에 대해 뭐라고 평이라도 해보고 싶은데, 그러면 그럴수록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 그저 재미있다라는 말로는 턱없이 부족한 표현에 대한 분노일까?
『바람의 화원』은 정말 바람같이 내게 와서 바위처럼 내 안에 눌러앉았다. 이제는 들어옮기려고 해도 옮길 수가 없다. 이 책은 감히 내가 최고의 책이라고 주저없이 말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책임에 분명하다.
처음 이 책의 소개글을 읽었을 때만 해도, 난 이 책 역시 역사와 추리를 적절히 접목시킨 그저그런 팩션추리소설일 줄로만 생각했었다. 총 2권으로 되어 있는 책은, 1권이 끝나갈 때까지도 추리적인 부분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어라??? 이거 추리소설이 아닌가??’ 추리소설이라는 걸 거의 잊어버릴 즈음에서야 겨우 한번씩, 그러나 강렬하게 툭툭 던지는 의문들. 물론 추리적인 부분 또한 다른 여타의 책들보다 훨씬 훌륭하지만, 나는 이 책이 추리소설이라고 생각지 않으련다. 내게 있어 이 책은 추리소설도 아니고, 역사소설도 아니고 그저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휴먼소설일 뿐이다.
모든 것은 그림에서 시작되어 그림으로 끝이 났다. 이 한마디로 이 책을 80%이상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은 그들에게 그리움이요, 사랑이요, 치열한 전쟁터이자, 추억의 샘터이다. 그림은 곧 그들의 모든 것이다.
김홍도와 신윤복. 조선 후기 풍속도의 대가들. 우리나라에서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들이 같은 시대를 살다갔다. 그러나 지금껏 이 부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 역시도. 그저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만 어쩌다 교과서에라도 나올라치면, "오~ 꽤 잘그렸네? 조선시대에??" 그냥 그러고 넘어갔을 뿐. 그래놓고 어디가서는 김홍도와 신윤복을 잘 아는 것처럼 씨부렁거렸던 나의 오만. 이제야 내려놓는다. 나의 오만을.
이 책을 읽고 나는 김홍도가 되었다. 아니 나는 그냥 홍도였다. 작가가 의도한 것이라 해도 나는 기꺼이 열번, 스무번이라도 그 낚시떡밥에 낚여줄테다. 나는 김홍도가 되어, 신윤복을 사랑하고, 질투하고, 미칠 듯이 갖고 싶었고, 또 미칠 듯이 그리워했다. 나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김홍도와 혼연일체가 되는 데 조금의 문제도 없었을 만큼, 작가의 문체는 섬세하고 감정의 떨림은 미세했다. 그리고 그가 있었다. 또 한 명의 천재.
조선의 왕 중에 내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임금. 정조대왕. 그를 다룬 그 어떤 역사책보다 더 생생하고 생명력있게 살아있었다. 이 책에. 그저 일관되게 똑똑한 군주, 개혁의 임금으로만 표현되어 온 정조였으나, 이 책에서만큼은 그의 아픔이 오롯이 녹아있었다. 그의 깊은 아픔에 나도 울고 홍도도 울고, 윤복이도 울었다.
마지막으로 천둥벼락과도 같이 내 세계를 온통 뒤흔들어 놓은 신윤복. 그의 그림은 내게 불멸이 되었다. 나는 이제 미칠듯한 심장박동의 빨라짐 없이는 그의 그림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마 노년에는 그의 그림을 보는 것을 자제해야 할 지도. 너무나 두근거리는 심장은 내 것이 아니라 타인의 것처럼 낯설다. 이 책을 보기 전에는 그의 그림이 이다지도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지 몰랐다. 이 책을 보기 전에는 그의 그림이 이다지도 파격인지 몰랐다. 이 책을 보기 전에는 그의 그림이 이렇게 영혼을 울리는 지 나는 몰랐다. 나는 소설의 내용보다도 그의 그림에 더 몸을 떨었고, 그의 그림에 노예가 되었다. 이제 신윤복을 모르던 때의 나를 기억할 수 조차 없게 되어버렸다. 한편으로는 작가가 원망스럽고, 한편으로는 작가가 너무나 존경스럽다.
3명의 천재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빛의 향연. 그 영광된 자리에 초대받아 함께 할 수 있어서 너무나 놀랍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단 한권의 책으로 역사 속에 소리없이 잠들어 있던 인물에게 이렇듯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니. 작가의 능력에 소름이 끼친다. 전율이 느껴진다. 너무나 질투가 난다. 우리나라에도 이제 이정도의 역량을 가진 작가가 나오다니...그동안 남의 나라 작가들을 격하게도 부러워했던 나였는데, 이제 그런 나의 마음에도 한가닥 위안이 생겼다.
『바람의 화원』. 그 이름 그대로 바람같이 와서 바람같이 떠난 그대여. 그대는 바람처럼 날아갔지만, 한줄기 바람은 없어지지 않고 내 가슴에 남아 불멸의 혼이 되어 세상 곳곳으로 소리없는 아우성이 되어 유랑하리라. 영원히 함께 하자스라. 그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