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처선과의 준비된 만남
『왕과 나, 김처선』은 SBS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사극 "왕과 나"의 원작소설이라고 해서 출간전부터 나의 기대를 한몸에 모은 책이다. 기존의 역사소설이라고 하면 그저 왕이나, 왕족, 또는 명망있는 신하들, 학자들, 예술가들 등등 이미 역사속에서 찬란하게 빛나왔던 인물들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 『왕과 나, 김처선』은 특이하게도 이름조차 낯설은 조선시대 내시였던 김처선을 주인공으로 하여 작가가 팩션을 가미해 쓴 역사소설이다.
김처선은 세종때부터 연산군때까지 7분의 임금을 모신 내시이다. 보통 이 정도의 이력을 가진 내시라면 말년엔 웬만한 정승판서 부럽지 않은 호사를 누리며 인생을 화려하게 마감할 수 있었을 텐데, 하필 그가 살던 시대가 조선 전기에서도 가장 격동의 시기였으니 그의 인생도 참 불운하다 아니할 수 없다.
- 자기 자신의 가치는 스스로가 높이는 것
소설은 이런 파란만장하고도 비극적인 김처선의 삶을 성종 때 사사된 폐비윤씨의 사건과 결부시켜 그리고 있다. 일단 재미는 있다. 꽤 두꺼운 두께의 책인데도 불구하고 앉은 자리에서 두어시간이면 다 읽을 정도로 빠르고 쉽게 읽힌다. 내용 또한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두번 쯤은 들어봤을 법한 꽤 흥미있는 소재인 폐비윤씨사건과 폭군 연산군의 얘기인지라 더욱 그러한지도.
폐비윤씨에 대한 연민으로 연산군을 목숨걸고 보살펴 보위에 올린 김처선. 그리고 마지막까지 연산군에 대한 걱정으로 목숨 건 충언을 했던 김처선. 다른 인간들은 그를 무시하고 비웃었으나, 김처선 스스로는 자신을 결코 비웃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존중한, 신념있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감히 임금에게 호통칠 수 있었으리라. 자기 자신의 가치는 스스로가 높인다 했던가. 김처선이야말로 세상이 보는 것처럼 자신을 비루하다 여기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를 역사속에 찬연히 흩뿌린 훌륭한 한 인간이었음을 나는 이제 알겠다.
- 2% 부족했던, 2% 더 알고 싶었던 내시들이여
다만 못내 아쉬웠던건 좀 더 내시들의 소소한 일들을 알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디테일한 면이 조금 부족했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수랏간 나인들의 그 처절한 경쟁, 또 몰랐던 의녀들의 삶을 자세하게 엿볼 수 있었던 것처럼 이 책에서도 내시들의 일상을 많이 알 수 있기를 바랬었다. 아마도 7명의 임금을 모시는 동안 굵직한 사건들만 해도 셀 수가 없는 질곡의 시대인지라,그 부분만 해도 솔직히 1권짜리 소설로는 턱없이 부족한 분량이었기에 그런 세세한 이야기까지 다루지 못했을거라 짐작해본다.
-역사 속의 엑스트라를 돌아보자
하지만 이 책 『왕과 나, 김처선』은 경멸로만 일관해왔던 내게 내시에 대해 깊이 생각할 기회를 갖게 해주었고, 또한 기존에 뼛속 깊이 박혀있던 못된 인식을 바꾸어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진 역할을 한 책이라 생각한다. 앞으로도 역사의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 역사 속의 엑스트라들에 대한 책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