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khskym님의 서재
감추고 싶은 치욕의 역사

1637년 1월 30일 남한산성에서 걸어나온 조선의 제 16대 임금 인조는 청 황제 태종에게 무릎을 끓고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며 목숨을 구걸하였다. 사실상 이 순간이 가뜩이나 정통성 약한 인조의 임금 노릇의 실낱같던 명분이 사라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 임진왜란을 모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허나, 임진왜란보다 백배, 천배는 더 치욕스러운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아니, 알아도 그냥 그런 역사속의 스쳐가는 한줄의 사건이려니 하고 아무생각없이 넘길 뿐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임진왜란은 승리의 역사이고, 병자호란은 치욕의 역사라서???

같은 외세의 침입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 속에서 병자호란의 위치는 찬밥신세나 마찬가지다. 아마도 이 사건에는 침략에도 불구하고 노력한 흔적이라던가, 자주성을 지키려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난 영웅들이나 민초들의 피흘림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변명 한 마디 못 할 정도로 그저 엎드려 "목숨만 살려줍쇼...그저 시키는 대로 다 하겠나이다~"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한 일이 또 있었던가.

드라마를 봐도 임진왜란을 다룬 사극은 많았고, 또한 시대적으로 근소하게 앞서 있는 광해군과 인조반정을 소재로 한 드라마 역시 많았다. 하지만, 병자호란을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는 기억에 없다. (내가 모르는 것일수도 있지만.;;)

그 겨울 남한산성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나 역시도 이 책 '남한산성'을 읽기 전까지 병자호란에 대해서 단순히 '인조 때 청태종이 쳐들어와서 남한산성으로 쫓겨갔다가 항복하고 황제한테 절하고 왕자들 볼모로 끌려가고 끝" 이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남한산성에서의 47일동안 그 안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보통이런 전쟁이 배경인 소설의 경우 전쟁과 주화파-주전파의 싸움에 포인트를 맞출 텐데, 작가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남한산성 안에서의 일들을 그리고 있다.

남한산성에서의 47일간의  농성(? 농성이라고 부르기도 멋쩍다.) 과 삼전도에서의 삼배구고두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 남한산성은, 얼핏 이런 흥미진진한 소재 때문에 쉽게 읽힐 거라는 생각으로 집어들었던 것과는 달리, 상당히 읽기 힘겨운 책이었다. 외견상 차라리 로맨스 소설을 연상시키는 듯한 화사한 핑크빛의 표지만 보고 그냥 하루 시간때우기용으로 가볍게 읽으려고 했던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한 장을 넘기기가 힘들었다.

지루할 정도로 이어지는 언어의 유희

역사적 사건이라는 소재때문에 소설이라는 장르적 압박을 생각지 못하고, 그저 역사책 같을 거라고 지레 짐작했던 게 잘못이었다.  거의 400여쪽에 달하는 분량 중 정작 스토리는 100쪽도 되지 않는다. 청이 침입해오자 인조와 신료들이 도망가다가 길이 막혀서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에 틀어박혀 47일동안 웅크리고 있다가, 황제가 직접 와서 나오라고 하니까 바로 나와서 절하고 끝이다.

나머지 4분의 3은 전부 말놀음이다. 이 분은 시인이 됐어야 하는 분인데..잠시 착각했을 정도로 뜬구름 잡는 말의 유희들... 그 지루할 정도로 끝없이 이어지는 비유들. 솔직히 최근 속도감있고 직설적인 일본 소설들만 계속 읽다가 이 책을 읽으려니 더 답답하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중반부까지 솔직히 책 덮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손에 잡힐 듯 생생한 장면묘사

소설 특유의 생동감은 느껴지지 않았고 마치 정지된 화면을 묘사하듯 온갖 미사여구들로만 가득하다. 사실 내용의 답답함이 문체의 답답함으로 이어져 아주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정말 답답 그 자체인 남한산성에서의 농성(?)을 이보다 더 생생하게 전해 줄 수 없는 문체이다. (의도한 것이라면 작가가 정녕 천재인 것이다)

전개 속도가 느리다 보니 장점 역시 많다. 많은 생각을 하면서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초반에 느꼈던 고여있는 물과도 같은 참을 수 없는 답답함 덕분에 오히려 당시의 상황이 더 간절하게 와 닿았다. 뭐라도 하고 싶은데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남한산성 안의 그들의 심정이 전해져왔다.

길고 느린 호흡으로 인하여 한 장면 한 장면이 눈 앞에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게 다가온다. 실제로 지금도 남한산성 행궁 내행전 안에서 인조와 조정신료들이 마주앉아 이야기 하고 있는 장면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정도이다.

'남한산성'은 삼전도의 치욕을 변명하거나 옹호하려고 쓴 책이 아니다.

 이 책을 통해 인조의 새로운 모습, 우리가 몰랐던 모습을 조금이라도 찾으려 했다면 포기하시길...
이 책은 그저 느리고 담담하게 남한산성에서의 47일동안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얘기해 주고자 하는 책이다. 얘기해주고자 하는 내용은 '무슨 일이 있었는가' 이나, 정작 얘기하는 내용은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이다.

조선의 임금 중에 가장 무능하고 임금 자격 또한 없었던 인조. 그는 혈통으로서나 능력으로서나 전혀 임금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당쟁만 일삼던 건방진 신하들이 자기의 당색과 다르다고 하여 인목대비와 짜고 감히 멀쩡한 임금을 내쫓고 자기 입맛에 맞는, 한마디로 조종하기 편한 꼭두각시로 앉힌 것이 바로 인조이다. 물론 인조 역시 왕위에 대한 욕심이 컸다. 그 삼박자가 맞물려서 인조반정이 일어났지만.

왕위에 대한 욕심으로 명분도 정통성도 없는 반정을 일으켜 왕위는 손에 넣었지만, 인조는 당시의 멍청한 사대부들과 마찬가지로 급변하는 중국의 정세를 읽을 능력이 없었다. 광해군이 간신히 다져놓은 청과의 관계를 한순간에 쓰레기로 만들어버리고 말았으니...

나라의 죽음, 자식의 죽음을 부른 과한 욕심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답답했던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자신있게 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명을 택했으면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었을 게 아닌가. 아니면 믿을 구석을 만들기라도 했어야 하는게 아닌가 말이다.그저 말로만 오랑캐 따위와 손 잡을 수 없다고 큰소리 떵떵 치고, 정작 병자호란까지의 몇년 동안 인조는 아무 것도 한 게 없다. 싸울 각오를 했으면 군사력을 키우던가, 이도 저도 자신없으면 청이 쳐들어왔을 때 제대로 피할 성이라도 마련해놓던가 했어야지. 이건 뭐...쳐들어오니까 우왕좌왕 하다가 코 앞까지 왔을 때 도망가..그 마저도 길 막혔다는 소리에 눈 앞에 있는 남한산성으로 대책없이 들어간다. 산성 안에 식량이나 물자의 준비는 물론 하나도 되어 있지 않고 말이다. 이런 사람이 한 나라의 임금이다. 이런 사람들이 한 나라를 다스리는 조정대신들이다. 어찌 개탄스럽지 않을 수 있으랴...

인조는 죽음으로써 진정한 삶을 얻었어야 했다. 명분도 실리도 다 잃고 살아봤자 죽느니만 못하다. 삼전도의 치욕 이후로 인조는 가뜩이나 없는 정통성과 명분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죽을 때까지 정당하게 자신의 것이 아닌 왕위에 대한 불안으로 백부인 광해군에 이어 친아들인 소현세자까지 죽여버리고 만다.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의 경우는 당파싸움에 휘말려 신하들에게 속았다는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만, 인조는 그것도 아니다. 오직 그 자신의 망상으로 아들을 죽이고, 며느리도 죽이고, 손자들도 모두 몰살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을때는 이미 인조의 정신은 온전하다고 볼 수 없다. 삼전도의 그 날 이후로 인조는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욕해봤자 내 얼굴에 침뱉기!

'남한산성'에는 임금과 신하들 이야기 뿐만 아니라, 민초들의 이야기도 조금..아주 조금 나온다. 하지만 주체적으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그저 불특정 다수의 이미지로만 그려지기 때문에 별 인상을 주지 못한다.소설의 처음과 끝까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 하는 것은 임금과 신하들의 공허한 대화이다. 서로 다른 곳만 바라보며, 상황을 해결할 책임을 서로에게 떠 넘기느라 바쁘다. 주화파 최명길과 주전파 김상헌의 대립(?)도 이 작품에서만큼은 힘이 없다. 둘의 관계를 너무 미화시키려고만 해서 오히려 설득력을 잃었다. 오히려 치열하게 대립하는 모습을 그려줬다면 더 좋았을 거라 본다.

반면 침략자 청의 모습은 조선 사람들과는 정 반대로 대인배(?)적인 모습으로 그려 남한산성 안에서의 찌질한 인간군상과 대비되어 너무도 가슴아프게 다가왔다. 읽으면서 계속 인조와 그 똘마니들을 욕하긴 했지만, 어차피 그래봤자 내 얼굴에 침 뱉기인 것을... 인조가 청 황제에게 무릎꿇고 절하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울컥해 참기 힘들었다. 인조가 안됐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는 순간이었다. 죽지도 못하고, 그것이 죽음의 길인줄 알면서도 본인은 살 길이라 애써 자위하며 남한산성을 걸어 나가는 순간 인조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인조와의 힘겨운 화해

소현세자와 광해군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인조를 많이 미워해왔던 나였는데, 이 책을 읽고 처음으로 인조가 불쌍해졌다. 사람이 자기 것이 될 수 없는 것을 욕심내어 빼앗아 갖는다 해도 결코 행복할 수 없음을...갖고 싶은 것을 가졌음에도 평생을 불행하게 보내야 했던 인조의 모습에서 위안을 얻었다고 해야 하나...

'남한산성'을 읽으면서는 많이도 고통스러웠지만, 읽고 난 후에는 잘 읽었다는 생각 뿐이다. 읽지 않았다면 난 평생 인조를 오롯이 미워하며 조금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나 역시 불완전한 인간으로 수많은 결점을 안고 살아가는데, 내가 무엇이관대 감히 다른 사람을 미워하며 경멸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책으로 인해 난 인조와 어느 정도는 화해할 수 있었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