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컬린 더핀의 <의학의 역사>는 현직 혈액학자이자 의사학(의학 역사학)자인 저자가 단순한 연대기적 나열을 넘어 현대 의학의 근간 설명해주는 책이다.
이 책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복잡한 서양 의학의 흐름을 현대 의학의 전문 분과별로 나누어 추적한다.
우선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 약리학 등 의학의 뼈대가 된 학문들의 패러다임 전환 과정을 다루고, 이어서 외과학, 산부인과학, 정신과학, 소아과학 등이 시대적 요구와 기술 발전 속에서 어떻게 독립된 분과로 파생되었는지 임상 전문분야별 형성과정을 설명해준다.
또한 백신, 항생제 도입 등 전염병에 맞선 인류의 노력과 함께, 의학이 환자와 사회의 삶에 미친 영향을 인간사적 관점에서 풀어낸다.
의학의 역사를 어찌 이 한 권에서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마는, 방대하고 전문적인 의학 용어와 복잡한 서양 의학사를 일반 대중이나 의학 입문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명료하게 정리했다. 맥락을 짚어주는 서술 덕분에 일반 독자들을 위한 가독성이 뛰어나다.
무엇보다도 저자는 의학을 단순히 영웅적인 의사들의 천재적 발견이나 기술적 진보의 역사로만 보지 않는다. 치료를 받는 환자의 고통, 질병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 문화적 배경을 중심에 두어 의학을 '인간의 역사'로 환원시키는 입장을 내내 견지한다.
옥의 티를 꼽자면 제목은 '의학의 역사'이지만, 내용의 대부분은 서양 의학의 역사에 철저히 국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동양 의학이나 기타 전통 의학에 대한 서술 비중이 매우 낮아, 진정한 의미의 '세계 의학사'라기보다는 '서양 현대 의학의 형성사'로 봄이 옳을 것이다.
또한 주제별 구성을 취하다 보니, 특정 시대의 정치·경제·문화적 배경이 의학 전반에 동시에 미친 총체적인 영향력을 파악하기는 다소 어렵다. 시대별 종적 흐름을 중시하는 독자에게는 서술이 다소 파편화되어 보일 수 있을 것 같다.
총평하면, 이 책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현대 의학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며, 수많은 시행착오와 비판적 검증을 거쳐 형성된 '역사적 산물'임을 깨닫게 해준다. 의학 전공자에게는 자신이 다루는 학문의 뿌리를 돌아보게 하고, 대중에게는 과학과 인간이 만나는 가장 치열한 현장을 안내하는 훌륭한 나침반 같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