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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온유 작가의 신작 <경우 없는 세계>는 제목부터 흥미롭다. 경우는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
사리나 도리? 조건? 형편이나 사정? 그도 아니라면 사람? 처음부터 없었다는 건가 있다가 잃어버렸다는 건가.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건가. 대체 ‘경우’는 무엇일까. 온갖 질문이 머릿속을 헤집어 놨다.
“열일곱, 살기 위해 더없이 악독해질 때마다 거짓말처럼 ‘경우’가 있었다.”
주인공 인수의 고백에 이르러서야 이 모든 질문에 답을 주었다. 작가는 50페이지가 넘어서야 경우의 존재를 알려준다. 그 장면을 만나기까지 독자는 경우를 향한 궁금증을 품은 채 주인공 인수의 서사를 따라간다. 작품은 현재와 과거의 어느 시점을 오가며 독자를 흡인력 있게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다.
주인공 인수는 골목길에서 자 해공갈로 생계를 유지하는 가출 청소년 이호를 만난다. 이호를 만나고서 심연 저편에 자리한 어두운 과거와 조우한다.인수는 10대 가출팸 시절의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성장한 어른이다. 집은 부유했지만, 권위와 폭력을 동시에 휘두르는 아버지와 이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견디는 어머니 사이에서 명민하지 못한 아들로 살다 가출청소년의 길을 걷는다. 이호는 그런 과거 인수와 거리의 친구들과 꼭 닮은 모습이다.
10대 시절 인수가 가출 후 처음 만난 친구는 성연이다. 노숙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끼니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생존하기 위해 무엇을 버리고 취해야 하는지를 몸소 알려준 아이다. 나쁜 짓도 망설임 없이 하며 도덕의 경계를 쉽게 넘나드는 거친 성정을 가진 인물이다. 길 위에서 만난 아이들 대부분이 그랬다. 그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기도 쉽게 흩어지기도 했다. 인수도 그들처럼 계획 없는 삶에 익숙해져 갔다. 인수를 포함한 아이들은 하루하루 버티며 되는대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전혀 다른 결의 가출 청소년 경우가 등장한다. 자신만의 윤리준칙이 있는 가출 청소년 세계에서 없을 것만 같은 성격의 소유자다.
경우는 불우하게 자랐음에도 늘 착실하며 구김살 없는 인물로 남의 지갑을 훔치지도 않고, 비굴하지도 않다. 특유의 신중함과 타인을 향한 예의가 있는 가출 청소년. 성연의 적대도 유연하게 받아넘기는 모습을 보며 인수는 경우 곁에서 나쁜 짓을 하지 않고도 길 위에서 살아갈 방법이 있음을 배운다. 그렇게 몇몇 아이들이 빈집에서 가출팸으로 살던 중 인수와 아이들은 큰 사건을 겪게 된다. 작품 속 유일하게 이름을 갖지 못한 존재 A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들은 아이들을 길 위에서 벼랑 끝으로 내몬다.
폭력과 무기력을 반복적으로 경험한 청소년들은 어른과 사회를 향한 신뢰를 잃는다. 그들이 어른의 보호를 거부하고 길 위에서 살기로 했을 때, 이 사회는 그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 과연 그 모든 결과는 각자의 선택과 책임의 범주에서 논의되는 게 마땅한가.
작가는 인수의 시선으로 인물들 하나하나를 생동감 있게 그려내며 아이들이 겪는 세상의 비정함,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없는 어른들의 부재를 통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깊고 진지한 물음이다. 대상에 대한 깊은 존중과 공감을 위한 노력이 곳곳에서 읽힌다. 정용준 소설가의 추천사처럼 읽고 나면 조금은 성장하게 되는 작품. 추천.
“자기 자신을 성장시킨 어른의 이야기는 언제나 감동적이지만 남을 성장시키기로 결심한 이야기는 소중하다. 해피엔드의 주인공 되기를 포기하고 다른 이의 슬픈 하루를 기쁨의 내일로 바꾸려 애쓰는 각오가 좋다. 나의 성공으로 남의 절망을 함부로 대체하지 않는 마음이 좋다. 한권의 소설이 이 비정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책을 덮고 조금 성장한 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용준 소설가의 추천사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