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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0207님의 서재
  • 과연 그것이 미술일까?
  • 신시아 프리랜드
  • 15,200원 (5%480)
  • 2002-12-20
  • : 616

  

이 책이 좋은 책이라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현재 미국의 예술철학자이자 미술평론가로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Arthur Danto가 이 책에 대해 언급한 다음과 같은 칭찬 그대로이다:  

 "나는 오늘날 그렇게 신속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예술가 사회가 전투를 벌이는 지역을 두루두루 밟아나가는 저작을 알지못한다."  

 이 문장을 번역자(전승보)는 다음과 같이 오역했다.  

"나는 오늘날 어떠한 예술작품도 그렇게 신속하게 작용할 수 없으며, 예술과 사회가 전투를 벌이는 지역을 떠나서도 작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아트북스에서 출간된 이 책의 속표지 바로 다음 장부터 시작된 이 어이없는 오역은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시종일관 이어지는 기나 긴 오역의 행렬은 끝이 없다. 특히 1장과 5장의 오역 수준은 가관일 정도인데, 2장에서 발견된 오역만을 짚어보기로 하자.     

 ------ 2장. 페러다임과 목적 

51~52쪽:  “우리는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 (출발해), 중세 (샤르트르)로, (그 다음에) 베르사유의 형식적 정원들(1660~1715)로 나아가고, 1882년에 만든(→ 초연된) 리처드(→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로 이동할 것이다.

52쪽, 첫 단락 마지막 줄: “디오니소스의 죽음과 부활을 재연했던 비극은 종교(적 의미), 시민(적 의미), 정치적 의미 등 여러 층위에 걸쳐 있다.”  

 

53쪽, 2~3줄:  "이데아의 모사인 현실세계를 모방했다.”   → 이데아의 모사인 우리 세계의 사물들의 한낱 모방들만을 제공했다.      

 

53쪽, 아래서부터 8줄 이하:  “어떻게 훌륭한 사람이 불행에 처하게(→ 불행을 맞닥뜨리게) 되는가를 보여준다면 […] 악행을 저지르는 오이디푸스 같은 사람을 그려낸다(→ 재현한다).”   

 

53쪽, 아래서부터 2줄:  “도덕과 미적 기준을 융합하고 있는 『시학』을 통해 볼 때, […].”   → 그러나 도덕적 기준과 미적 기준을 융합하고 있는 『시학』을 . . .   

 

 

54쪽, 4줄:  “영웅 제이슨(→ 이아손)이 귀한 황금함대(→ 양털)를 얻는 것을 돕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와 형제를 배신했던 외국(여인 혹은) ‘야만인’ 여자 메데이아에 관한 것이다.”  

 

54쪽, 마지막 단락: “에우리피데스는 플라톤이 (분명) 부적당하다고 생각했을 장면들을 묘사하면서, 급변하는 살인 사건의(→ 살인사건의 급변하는 정서적) 체험 속으로 관람객을 끌어들인다.”  

 

55쪽, 1줄 이하:  “[…]에서 그것을(→ 소름끼치는 행위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가라, 가거라. (……) 나는 너희들을 볼 수 없다.  

나는 고뇌에 빠졌고 길을 잃었다.  

내가 하는 일이 악하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의 의지보다 열정이 나를 이끄는구나(→ 더욱 더 충동질하는구나).   

 

55쪽, 아래서부터 4줄 이하 ~ 56쪽:

“디오니소스를 숭상하는 전 도시의 종교적인 축제의 일원(→ 일환)으로서 비극 공연에 참석했다. […]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시민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에 관해서는(→ 차원들을) 분명하게 논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라는 예술을 그런(×) 맥락에서 분리시켰기(→ 추상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다른 분야(→ 시대)의 비극(,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적용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 (비극의 주인공이 악한 의도에서가 아니라) ‘하마티아’, 즉(→ 혹은) 실수로 행동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소위 ‘비극적 결함’이라는 이론으로 왜곡되었고, [. . .] 인간의 나약함에서 비롯되는 실수를 저지르는(→ 단지 저질렀던) 선한 주인공을 보여주어야 한다.”

 

57쪽, 1줄 이하: “그러나 (많은 발전들이(혹은 ‘정반대의 자료들’이) 예술의 모방론을 구성해온 많은 자료(혹은 ‘정반대의 자료’)는 지난 세기부터는 설득력이 약화된 듯하다(→ 지난 세기에 점점 더 그럴 듯 해보이지 않게끔 만들었다). 회화는 특히 최근에 출현한(→ 벼락출세한) 새로운 매체인 사진의 사실성(→ 리얼리즘)에 의해 도전을 받았다. 19세기 말경에(→ 후반 이래로), 모방은 인상주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추상주의 등의 점점 더 많은 미술 장르의 목적이 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57쪽, 마지막 줄: “샤르트르의 종교적이고 시민적인 삶 속에 잘 녹아든 예술형식을 (또 다시) 발견할 것이다.”   

 

63쪽, 아래서부터 4줄 ~ 64쪽:

“[…] 다른 이야기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학예’(→ 리버럴 아트)― 그리고 그 속의(×) 기하학과 수사학 같은 (각각의) 분야들 ―는 신학에 의해 지지되고 완성(→ 신학을 지지해야 되고 신학에 의해 지배)되어야 함을 보여주면서, 피타고라스와 아리스토텔레스는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된 조각상들 아래쪽에 위치한 출입구의 기둥 위에 있다. 이와 유사하게 훌륭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은 아래쪽에 구약이야기, 위쪽에는 예수의 묘사와 관련되어 있다.”

  

68쪽, 8줄 이하: “칸트는 베르사유를 판화를 통해 보았을 것이고, 하노버의 헤렌하우스(→ 헤렌하우젠) ― 철학자 라이프니츠의 대화록 중의 (몇몇) 장면 ―에 필적하는(→처럼 베르사유를 열심히 흉내낸) 정원들을 알고 있었을지라도 그곳에 가본 적은 없었다.”

 

68쪽, 아래 인용문:  

칸트는 베르사유의 정원사를 ‘형식들을 가지고 그리는’ 사람으로 간주했고, 그의 순수미술(→ 파인아트fine arts) 분류체계에 정원을 삽입했다.  

 

 풍경을 가꾸는 것은 (……) (몇몇 아이디어에 따라 상이하게 배치되었을 뿐,) 자연이 우리에게 단지 다르게 배열되고 어떤 이념에 따라 나타나는 것과(→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동일한, 잡다한 다양성(잔디, 꽃, 관목, 나무들, 그리고 심지어 물, 언덕과 골짜기)으로(→ 을 가지고) 치장(→ 장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69쪽, 7줄 이하:  

“그 대신 정원에 ‘아름답다’는 명칭을 붙이게끔 하는, 훌륭한 형식이 생산하는 ‘그 속성들(→ 인식능력들)의 조화’를 강조했다. 칸트는 지나치게 규칙적이고(→ 규칙적이지도 않고) 예측가능하지는 않지만(→ 예측가능하지도 않으면서) 질서정연한 면에서 베르사유를 찬양했을지 모른다. 작은 숲이나 관목 숲에 들어갈 때 사람들은 식물, 조각상, 꽃병, 분수들의 (제각각) 새로운 배열과 (서로 다르지만) ‘적절한’ 배치에 놀라게 된다. 칸트는 ‘그로테스크한 것으로(까지) 상상력의 자유를 밀어 넣기’ 때문에, (물 흐르듯 좀)더 ‘자연스럽게’(→ 자연스러운) 흐르는(×) 영국식 정원을 비난(→ 비판)했다. 지속적으로 변하는 베르사유 풍경의 다양성, 특별한 목적이 없는 외관상의 질서, (그리고 특히) 다양한 분수에서 비롯되는 감수성의(→ 분수에 의해서 환기되는 감각작용들의) 유희는 그것을 아름답게 ―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를 자극하는 어떤 것을 ― 만들 것이다.”    

 

 

70쪽, 아래서부터 2줄:  

"워홀의 초기 서명 작품(→ 가장 뛰어난 장기)인「브릴로 박스」(1964)를 살펴볼 것이다.” [* signature piece: 가장 뛰어난 장기(長技), 정평 있는 것을 가리킴]  

 

71쪽, 아래서부터 2줄:   

“비평가들은 이 오페라를 숭고하다거나 혹은 퇴폐적이라고 부르며 애정과 증오를 함께 보낸다(→ 좋아하거나 아니면 싫어하거나 둘 중 하나다).”    

  

73쪽, 5줄 이하:   

“그 음악은 성 금요일을 배경으로 한 마지막 장에서 기쁨에 찬 영적 전환을 보여준다. (이제) 성배의 기사인 파르지팔은 성창으로 인해(→ 성창을 가지고) 부상을 입은 왕을(→ 왕의 상처에 갖다댐으로써 그 상처를) 치료한다. 그 마지막 가사는 ‘구세주(→ 구원자)를 위한 속죄(→ 구원)’이다.”   

  

73쪽, 중간 시작 단락:    

“철학자 니체는 1876년의 바그너의 권위 있는 작품 「니벨룽겐의 반지」의 (초연을)  작곡가 리스트, 차이코프스키, 그리고 수많은 군주와 귀족과 나란히 첫 공연을(×) 관람했던 (예전의)  팬이었다. 니체는 1868년에 바그너를 만났고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은 바그너에게 헌정되었고, ‘비극의 재탄생’이라는 열렬한 용어로 바그너를 이야기했다. 철학자(→ 문헌학자)이자 젊은 교수였던 니체는 비극의 기원을 디오니소스 신의 숭배로부터 설명했다. 비극적인 상상력은 의미나 정당성이 없는 격렬함과 고통스런 삶의 본질을 보여주었다.”   

  

74쪽, 중간 시작 단락:   

“그러나 188년 니체는 바그너와 「파르지팔」을 호되게 꾸짖는 『바그너의 문제(→ 경우)』를 발간했다. […] 너무 ‘기독교’적인 것이라고 거부했다. ‘붕괴와 절망과 퇴폐를 겪으면서 바그너는 (……) 성호를 긋기 전에(→ 기독교 십자가 앞에서) 무기력하게 파산한 채 가라앉았다.’ 니체는 그것의 구성(→ 플롯)이 삶을 부정하고 ‘병들고’ 완전한 긍정이 아니라는 ― 진정으로 디오니소스적이지 않다는 ―점을 발견했다.”   

  

75쪽, 8줄:  

“이것은 상당히 최근까지도 그의 음악이 이슬람권(→ 이스라엘)에서 비공식적으로 금지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사연 때문이 아니더라도 어떤 사람들은 장엄한 주제와 구성(→ 플롯) 때문에, 혹은 듣기에 버거운 40분짜리 사랑의 이중주(→ 이중창)를 하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같은 자기도취적인 성격(→ 캐릭터들) 때문에 바그너를 비웃는다. [ . . . ] 니체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바그너의 오페라를 평가할 때, 자신들의 미적이고(→ 미적인 관심사와) 도전적인(→ 도덕적인) 관심사가 (충돌하여) 곤경에 처하는 것을 경험한다.”   

  

76쪽, 3~4줄:  

“라고 했고, ‘사람들은 누구나 (15분 동안) 유형해질 수 있다’라는 냉소적인 슬로건을 만들기도 했다.”       

 

76쪽, 아래서부터 2줄 이하:  

“워홀은 1964년 뉴욕의 스태블러 화랑(→ 스태이블 Stable Gallery)에서 수공으로 등사한 베니어판 상자들을 전시했을 때 이미 상업적인 미술가로 성공했다.”   

  

79쪽, 인용문 다음 줄부터:   

“단토는 어떤 특정한 형태의 예술을 찬성하는 일을 피하려고 한다. 그의 다원주의적 이론은 왜 예술이(→ 예술계가 오늘날) 피의 축제, 죽은 상어, 그리고 성형 같은 다양한 작품을 예술로 수용하는지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79쪽, 아래서부터 6줄 이하:  

"세라노와 관람객은 그 사진작품을 예술로 여길 수 있는 어떤 배경이론과 상황(→ 배경이론이나 맥락)을 공유한다. 그것은 물리적인 매체를 통해 사상과 감정을 전달(→ 의사소통)한다.  

 

단토는 각 시대와 상황(→ 맥락)에서, 역사적이고 제도적인 상황(→ 맥락)이 주어진다면 예술가는 어떤 것을 예술로 창조한다고 주장한다. 토는 어떤 특정한 형태의 예술을 찬성하는 일을 피하려고 한다.”   

  

82쪽, 1줄 이하:  

“나는 의미와 가치의 문제들을 더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비 서구 예술의 실례들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지구를 빙 둘러 이번에는) 세계여행을 더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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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여러모로 유익하고 유용한 책이다. 아무쪼록 재번역을 통해 다시 출간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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