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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딩은 있는가요
- 장강명 외
- 16,200원 (10%↓
900) - 2025-12-17
: 2,950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생전의 그녀는 세상과 치열하게 부딪쳤는데, 나는 편안한 소파에 앉아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 안온한 추모가 마냥 편할 수는 없었다. 여러 단편 중에서도 나는 최유안 작가의 「모두의 진심」에 오래 머물렀다. 막연한 불편함이 실체적으로 다가와서였다.
번역가로 고단하게 버티는 화자 ‘설아’의 시선을 통해 권력의 사다리를 놀이처럼 오르는 ‘현보’라는 인물이 드러난다. 8만 원짜리 코스 요리를 앞에 두고, ‘나라’를 명분 삼아 친구들을 스펙의 도구로 부리는 데 주저함이 없는 그. 정제된 그의 태도를 서늘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설아의 자각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소설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어버렸다. 고(故) 정아은 작가가 생전에 던진 화두가 역사 속 권력자에서 보편적인 개인으로 옮겨졌기에 발생하는 감각이었다.
생전 고인이 “왜 그들은 무릎 꿇지 않는가?”라며 확신범의 내면을 끝없이 추적했다면, 최유안 작가는 그 시선을 가져와 질문의 칼날을 내 옆자리로 끌고 왔다. 이제 확신범의 얼굴은 역사 속 권력자의 초상이 아니었다. 나와 함께 밥을 먹고, 마주 앉아 웃는 보통 사람의 것이 될 수 있었다. 절대 권력자는 사라졌지만, 그 논리와 태도는 파편화되어 개개인의 내면에 숨어있을지도 모를 일. 어쩌면 그 얼굴이 내 것일 수도 있다는 섬찟한 자각이 들었다. 악의가 없기에 더 바로잡기 힘든, 각자의 ‘진심’들이 빚어내는 모습을 소설은 펼쳐 보였다.
『엔딩은 있는가요』는 마음껏 슬퍼할 권리를 주기보다, 마땅히 감당해야 할 질문의 무게를 건넨다. 이것이 마치 고인을 기리는 치열하고도 정직한 방식이라는 듯이…. 최유안 작가는 작품을 통해 정아은 작가에게서 ‘용기’를 물려받았다고 고백한다. “내 글로 하고 싶은 말을 하며 살아가겠다”라는 그녀의 다짐을 보며 생각했다. 용기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태도이기도 하지만, 듣기 싫은 말을 끝까지 듣게 만드는 태도이기도 하다고. 그렇다면 이 책은 분명 용기 있는 책이다. 독자에게 편안한 망각을 허락하지 않는 책이기 때문이다.
이별이 닥쳤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상실을 껴안는 일에 명쾌한 해법도 없다. 다만 잊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하나 있다. 잎이 진 자리에도 언젠가는 겨울눈이 맺힌다는 사실이다. 슬픔을 땔감 삼아 얼어붙은 시간을 녹이는 것도, 눈물을 흘려서 마음을 씻어내는 것도, 아끼는 책에 볕이 들도록 책장을 넘겨주는 것도 헤어짐을 견디는 방식일 것이다. 부재가 만들어낸 구멍을 이야기로 메우며, 한 영혼이 지녔던 정신을 잊지 않으려는 아홉 명의 시도처럼 말이다.
책장을 덮었는데도 엔딩은 오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그녀가 없는 세상에서 속절없이 그녀의 문장을 다시 펼친다. 봄은 멀고, 읽어야 할 페이지는 아직 많이 남았다. 그렇기에 확신했다. 이 책은 고인의 삶을 끝맺는 에필로그가 아니라고. “우리는 한 번 마음에 담았던 사람을 잊지 못한다. 마음에 담고 다니며 끊임없이 소환해 그리워한다”라던 정아은 작가의 문장처럼, 영원히 그녀가 쓰이고 읽히기를 나는 바랐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을 마음에 담는 일이며, 남겨진 우리가 ‘엔딩’을 유예하는 방식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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