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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haha0125님의 서재
  • 은행나무 열매
  • 미야자와 겐지
  • 16,200원 (10%900)
  • 2020-11-25
  • : 609

그림책은 볼 때마다 다르게 다가오는 게 매력인데, 이 책 <은행나무 열매>는 ‘은행나무 열매’의 의미가 생각할수록 다르게 다가오는 게 매력이었다. 그보다 더 큰 매력은..? 미야자와 겐지의 언어를 통해 전해지는 감각적 상상의 순간들이었다 :)

 

 

하늘 꼭대기는 차갑고 차가워서 단단하게 담금질을 해댄 강철 덩어리입니다. 그리고 별이 가득합니다. 그렇지만 동쪽 하늘은 벌써 연한 도라지 꽃잎 같은 오묘한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새벽하늘 아래, 한낮의 새들조차 가지 않는 높은 곳을 날카로운 성에 조각이 바람에 실려 사락사락 사락사락 남쪽으로 날아갔습니다. 아주 희미한 그 소리가 언덕 위 한 그루 은행나무에게도 들릴 만큼 맑고 투명한 새벽입니다.

 

 

이 책의 시작이자, 주인공 은행나무가 소개되는 장면이다. 새벽의 어둠에 오묘한 빛이 스며들고 새벽의 알싸함에 청명함이 깃드는 이 느낌에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제법 머물러 있었다. 동시에 그림 작가의 고뇌도 느껴졌다. 이 문장을 보고 도대체 어떻게 그림으로 표현하지? 하는.

 

이 책은 은행나무 열매의 ‘길 떠남’에 대한 이야기다. 은행나무 열매 1000개가 떠나기 전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 그 속에서 가지는 나름대로의 꿈들, 그리고 떠나기 직전까지의 좌충우돌 준비 과정이 담겨 있다. 이런 은행나무 열매의 길 떠남엔 은행나무의 준비도 담겨 있었다.

 

 

                            

그리고 오늘, 아이들 모두 한꺼번에 여행을 떠납니다. 어머니는 그것이 너무 슬퍼서 부채 모양 황금 머리카락을 어제까지 모조리 떨구어 버렸습니다. (...) 동쪽 하늘이 하얗게 타오르며 일렁일렁 일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 나무는 마치 죽은 듯이 가만히 서 있습니다.

 

 

책에선 은행나무 열매는 아이들로, 은행나무는 엄마로 그려진다. 그래서 처음 읽으면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마음에 공감하게 된다. 불안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스스로 자신의 삶을 향해 나아가는 아이들을 묵묵히 봐줄 수 있는 마음. 그것이 아이들에게 진짜 필요한 엄마의 마음이구나.

 

 

 

​                        

​다시 읽으면서는, 두 손 꼭 잡은 은행나무 열매의 의미가 조금씩 변해갔다. 처음엔 나와 독립된 존재인 우리 아이들이었다가, 어느 순간엔 익숙함에서 벗어나 새로움으로 나아가며 주춤거리는 나였다가, 어제는 결혼 생활을 함께 해 나가는 신랑과 나이기도 했다가, 오늘 허리가 유난히 아픈 걸 경험하면서는 내 몸과 마음이 두 손을 꼭 잡고 있는 나 자신이기도 했다. 그렇게 은행나무 열매는 아이들의 성장의 발걸음에서 시작해 나의 성장하는 삶을 생각케 했다. 남편과 함께 20년 가까운 결혼생활을 하며 지금 다시 설정해보는 아내와 며느리의 역할,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 엄마로서의 역할, 미루고 미루던 나 스스로의 정체성을 이루어 나가는 개인으로서의 성장까지. 사실 남편과 아이들 뒤에 숨어 나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최대한 미루며 살아왔었다. 그런데 작년, 첫 애가 고1이 되며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이 책의 은행나무 열매들처럼 나만의 발걸음을 시작하게 되었다.

 

 

 

별안간 빛다발이 황금 화살처럼 한꺼번에 날아왔습니다. 아이들이 펄쩍 뛰어오를 만큼 눈부셨습니다. 북쪽에서 얼음처럼 차갑고 투명한 바람이 휭 하고 불어왔습니다. “엄마, 안녕.” “엄마, 안녕.” 아이들이 다 같이 한꺼번에 비처럼 나뭇가지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전문가로 불리긴 아직 멀었고 스스로 성취감에 뿌듯하기 보단 부족함에 아쉬움이 많지만, 은행나무 열매들처럼 꿈과 용기로 길을 나선 나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안정적인 나무에서 뛰어내려 자신의 길 위에 선 모든 분들에게 이 책의 마지막, 타오르는 해님의 눈부신 빛을 선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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